상실의 시대, 좋아해

트란 안 훙 감독. 상실의 시대

by 백승권

죽은 이들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져 간다.


너 이외에 원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 사랑해 지금 어디야?


미도리, 나야


정말 할 건가요?


레이코 씨는 다시 누군가와 사랑을 해야 합니다


나를 언제까지나 기억해줘, 약속해줄래

약속할게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은 치유할 수 없다


나오코가 죽었다


행복해지고 싶어


하지만 내게 왔을 때는 나만 봐야 돼


괜찮아 기다려줄게 널 믿으니까


그녀는 널 좋아하지 않아

뭐라고 설명할 수 없어


널 좋아해 진심으로 좋아해


하지만 난 나오코를 절대 버리지 않아


미안하지만, 얘기하고 싶지 않아


한 가지 충고해주지 자신을 동정하지 마


나 같은 사람 신경 쓰지 마

넌 네 인생을 살아야 하잖아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너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눈이 내리기 시작할 무렵 나를 만나러 와주지 않을래?


만약 괜찮다면, 함께 살지 않을래?

고마워


오고 싶으면 언제든지 괜찮으니까 내게로 와


혼자 여행을 하는 동안 널 계속 생각했어


그렇게 확신을 갖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멋진 일이겠죠?


제가 당신이었다면 헤어지겠어요


이건 게임이야 나는 상처받았어


괜찮아요, 비난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너무한다고 생각하니?


그건 하츠미의 문제지 내 문제는 아냐



다음에 포르노 상영관에 데리고 가줘.


키즈키가 죽은 뒤에는... (중략)... 사랑하는 게 어떤 건지 알 수가 없어졌어


난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야?

미안해, 하지만 이해해줘


가능하면 이런 이야긴 하고 싶지 않았어


죽은 사람은 계속 그대로 있지만 산 사람은 살아가야 하니까


날 좋아해?

좋아해 정말 좋아해


나 사귀는 사람 있어

그런 것 같았어


난 미도리라고 해






와타나베(마츠야마 켄이치),

키즈키(코라 켄고),


나오코(키쿠치 린코),

미도리(미즈하라 키코),


나가사와(타마야마 테츠지),

하츠미(하츠네 에리코),


레이코(키리시마 레이카)



















1. 기억상실증


인물이 많은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기억하지 못해 흐름을 놓친다. 소설 형식의 이야기 자체와 다시 가까워지려 시도한 것도 최근이다. 고등학교 시절 토지를 2/3 정도 읽다가 포기했다. 서희 말고는 아무도 기억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비, 관우, 장비, 조조, 제갈량 이 정도만 기억하는 삼국지에서 사람들이 조자룡이나 여포 등등을 넘어 무수한 인물들을 거론할 때 경외감을 느끼기도 한다. 지금 읽고 있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 년의 고독도 난감하긴 마찬가지다. 한 권의 책에 담긴 하나의 이야기가 다루는 인물이 셋 이상을 넘어갈 때 나는 혼돈에 빠진다. 20대에 소설을 멀리 했던 건 이 때문일 것이다. 생각해보니 오프라인에서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기억도 무척 한정적이다. 이름과 얼굴 모두. 여하튼 다시 돌아와 등장인물이 많은 이야기에 대한 태생적 거부감이 있었다.



2. 소설.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그리고 영화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이름보다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을 먼저 접했다. 일본 소설. 광고에도 등장했었다. 대학생들, 특히 여자들 중심으로 선풍적인 인기라는 것을 풍문으로 들었다. 관심 없었다. 소설로 가는 길에 내 발자국은 없었다. 시간이 훌러덩 지나고 영화화 소식을 들었다. 씨클로의 트란 안 홍 감독. 잘 모른다. 동양계 예술 감독 정도. 궁금했다. 종이의 질감보다 필름의 질감은 다르니까. 책을 더 오래 접했지만 영상이 더 긴밀하고 익숙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다시 몇 년, 와타나베(마츠야마 켄이치), 키즈키(코라 켄고), 나오코(키쿠치 린코), 미도리(미즈하라 키코), 나가사와(타마야마 테츠지), 하츠미(하츠네 에리코), 레이코(키리시마 레이카) 며칠 전 그들을 만났다. 그래, 적지 않다. 책으로 읽었다면 아마 헤매다 내려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인물이 없었다. 영화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한 명이 아닌 각각 모두가 각각 누군가를 사랑했던 한철을 담은 이야기라고.



3. 이야기와 인물들


와타나베, 키즈키, 나오코는 같이 다닌다. 키즈키와 나오코는 연인이고 와타나베는 키즈키의 둘도 없는 절친이다. 갑자기 키즈키가 자살하고 남은 둘은 흩어진다. 1년이나 지났을까. 와타나베는 나오코와 우연히 마주친다. 나오코는 예전과 다르다. 정처 없이 걷는 것을 좋아한다. 와타나베를 낯설어한다. 스며들듯 둘은 가까워지지만 둘 사이엔 키즈키라는 기억과 잔상이 남아있다. 나오코의 스무 살 생일, 와타나베는 정성 들여 축하해주지만 여전히 그들의 나이는 키즈키와 있던 시절에 머물러 있다. 둘 다 그것을 알고 슬퍼하고 기억한다.


와타나베는 학교에서 나가사와 선배와 방을 같이 쓴다. 나가사와는 훤칠하다. 스타일이 살아있고 과묵하면서도 아우라를 지니고 있다. 여자 친구가 있지만 다른 여자들을 만나고 다니고 그것을 여자 친구 하츠미도 알고 있다. 하츠미는 그가 관계를 도를 어긴 나쁜 남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헤어 나오지 못하는 자신을 알고 있다. 와타나베 역시 알고 있으면서도 그와 어울린다. 그의 라이프 스타일에 반한 듯이. 하츠미가 측은하지만 어쩌지 못한다. 나가사와는 훗날 해외로 떠나고 하츠미는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 2년 후 하츠미는 자살한다.


와타나베는 학교에서 미도리를 만난다. 미도리는 나오코와 달리 자의식이 강하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반드시 쟁취해야 하는 야심을 숨기지 않는다. 나오코를 좋아하는 와타나베와 남자 친구와 있는 미도리는 서로에게 끌린다. 서로에게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는다. 제멋대로인 미도리는 와타나베의 예상하지 못했던 한마디에 훌쩍 떠나지만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와타나베를 기다린다. 나오꼬를 좋아하는 와타나베를 이해한다.


와타나베는 궁금했다. 나오코가 왜 키즈키와 자지 않았는지. 찾아간 나오꼬는 여전히 아팠다.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마치 키즈키의 죽음 이후 정신과 육신이 황폐해진 사람처럼. 와타나베에게 의지하고 서로 좋아하게 되지만 그녀는 완전히 치유되지 못한다. 와타나베와 자지만 키즈키와 다름을 알게 될 뿐. 이를 인지하는 자신을 더 괴롭힐 뿐. 나오코는 18살과 19살의 나오코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정지해 있다. 그 시절이 가장 좋았던 것처럼. 시간의 압박을 이겨내지 못한다. 그 깊은 우울과 슬픔을 곁에서 레이코가 돌봐준다. 요양원의 룰은 나오코와 와타나베를 단둘이 두지 않았다. 나오코와 같은 환자지만 나오코의 보호자처럼 나오코를 돌본다. 둘을 지켜본다.


와타나베는 나오코를 깊이 좋아하지만 그의 마음속엔 미도리도 있다. 나오코에게 와타나베가 다녀오고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한 후, 나오코의 병세는 더 심해지고, 그녀는 어느 새벽 숲에서 목을 맨다. 와타나베는 떠난다. 슬픔이 들리지 않는 곳으로. 아무리 울어도 바람이 삼키는 곳으로. 아무도 없고 자기도 없어졌으면 하는 곳으로. 와타나베는 거대한 파도가 덮치는 바위 위에서 귀신처럼 울부짖고 울부짖고 또 울부짖고 가슴을 찢으며 울부짖고 몇 날 며칠을 울부짖는다. 그리고 레이코와 만난다. 레이코는 회복되지 않았지만 다른 곳으로 가기로 하고 와타나베에게 자신과 자줄 것을 '부탁'한다. 와타나베는 몇 개의 질문 후 부탁에 응한다. 레이코는 오랫동안 풀지 못했던 문제의 답을 얻었다는 말을 남기고 둘은 각자의 길로 떠난다. 와타나베는 미도리에게 돌아온다.



4. 좋아해


관계의 연속. 상실의 시대는 사랑과 상실을 통한 계속되는 관계를 보여준다. 키즈키가 죽고 와타나베는 나오코를 사랑하고 나오코는 키즈키에게서 끝내 벗어나지 못하고 와타나베는 미도리와 만나고 미도리는 와타나베를 좋아하고 와타나베의 선배 나가사와는 여자 친구 하츠미가 있지만 다른 여자들과 관계하고 하츠미는 나가사와를 사랑하다가 그가 떠난 뒤 자살하고 나오코는 와타나베를 사랑하게 되지만 자살하고 나오코의 보호자였던 레이코는 와타나베를 원하고 와타나베는 미도리에게 돌아온다. 18살 19살 20살. 누군가는 여전히 멈춰있고 누군가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누군가는 죽는다. 여전히 소설은 궁금하지 않다. 내게 상실의 시대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원작이기보다 트란 안 홍 감독의 영화일 뿐이다. 이와이 슈운지가 맡았다면 어땠을까. 물론 이 자체로도 충분하다. 다시 볼 수 있다면 다시 볼 것이다. 주 화자였던 와타나베의 영화가 아닌, 키즈키(코라 켄고), 나오코(키쿠치 린코), 미도리(미즈하라 키코), 나가사와(타마야마 테츠지), 하츠미(하츠네 에리코), 레이코(키리시마 레이카) 등 일곱 명의 주인공으로 그려진 영화였다. 러브레터보다 여운이 깊다. 이 대답 하나 때문에.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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