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만 감독. 킹덤
아이들과 부모들이 함께 야구를 즐기는 평화로운 오후의 공터. 수많은 백인들이 총알과 폭탄에 온몸이 찢긴 처참한 살육의 시간. 같은 자리, 같은 시간. 죄 지은자와 죄짓지 않은 이들의 이해관계 속에. 협상 대신 보복이, 악수 대신 테러가 답을 대신하고 있다. 이것이 거대한 왕국의 실체. 도저히 무너뜨릴 수 없는 갈등의 담. 그곳에서 아이들은 증오를 먹으며 자라고 있다.
뿌리 깊은 나무가 바람에 아니 흔들리듯, 뿌리 깊은 분노는 어떤 폭음과 피바람에도 열매를 맺지 못해. 제살을 기꺼이 깎아가며 표출되는 부지런하기도 한 테러, 테러, 테러들. 서양의 부를 상징하는 벤츠에 폭탄을 가득 싣고 돌진하는 이벤트의 연속. 세뇌와 교육을 통해 서슴없이 마지막 불꽃이 되려는 이들, 이 행위가 모두를 위한 의로운 희생이라 믿고 있는 테러리스트들. 자국민을 죽일 명분을 만들어 주기 위해 한결같은 지원을 아끼지 않는 미국 수뇌부들. 아름다운 공생관계. 지금은 힘들겠지만 조금만 참으렴. “모두 죽여버리면 돼.”
악수하며 웃지만 진심일 리 없고, 모두가 누릴 길 없는 소수의 부를 위해 다수의 희생이 자행되고, 이것이 당연한 것이 되고, 이것이 진리가 되고. 필요를 위한 필요, 희생을 위한 희생. 누구를 위한 다툼일까? 한가로이 노는 아이들을 폭탄으로 날려버리는 일이. 부상자를 나르기 위해 달려온 구급차를 폭파시키는 일이. 이게 정치일까? 이게 비즈니스일까? 아니면 그저 입 다물고 모른 척해야 되는 일일까?
오래전, 다이너마이트를 만든 노벨의 의도는 순수했을 거라 믿었다. 산업화에 따른 광산개발을 수월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하지만 이제와 자료를 찾아보니 그의 아버지는 무기 제조 사업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노벨은 진정 다이너마이트 제조와 뇌관(화약을 폭발하게 만드는 기폭제) 개발이 모두를 위하는 일이라 믿었던 걸까? 이것이 아이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던 걸까? 아님 행여 소수의 희생이 따르더라도 다수의 이익에 보탬이 될 수 있으리란 ‘정의로운’ 판단을 했던 것은 아닐까? 이것이 잔혹한 대화의 방식이 될 것이라는 것을, 누구의 친구, 누구의 부모를 죽일 수도 있음을 정말 개의치 않았을까? 그는 무기가 어떤 용도로 쓰일 물건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을 텐데.
노벨은 친동생을 잃는 폭발사고에도 불구하고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훗날 세계 각지에 다이너마이트 회사를 차려 대부호가 되었다. 죽기 전, 다이너마이트가 전쟁에 악용되는 것을 후회하며 자산을 기부, 노벨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현재 노벨의 후예(?)들은 전 세계 각지에서 직접 폭탄을 제조해가며 더 많은 이들을 죽이는 방법을 골몰하는데 여념이 없다. 후회는 노벨이 이미 했으니, 노벨상이라는 면죄부까지 만들어 놓았으니 이제 남은 것은 끊이지 않을 살육의 잔치뿐.
다이너마이트를 개발한 자리가 노벨이 아닌 누구라도 대신할 수 있었음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정일 뿐, 이미 노벨은 그 자리에서 너무 많은 것을 이뤄놓고 말았다. 난 지금 “그의 후회를 말하기엔 늦어도 너무 늦었다.” 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노벨상이 어느 개인에게 부와 명예를 안겨줄 수 있을지언정 폭탄테러를 줄이기엔 너무 미약한 명분이 되어버린 현실이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