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 계, 불안

이안 감독. 색, 계

by 백승권

불안은 사랑에 빠지기 위한 가장 강력한 필요조건, 하지만 사랑에 빠진다고 해서 그 불안이 해소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매번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불안해하고 그 불안을 메우기 위해 사랑에 빠지고 더욱 불안해한다. 악순환은 멈추지 않는다. 완전한 공존을 이루거나, 한쪽이 파멸하기 전까지는.


여자(탕웨이)의 불안. 그녀는 가장한다. 한 남자(양조위)를 제거하기 위해 상실감을 드러내고, 불안함을 보이며 관심을 이끌어낸다. 수려한 외모는 무기이며 떨리는 음성은 유혹의 전제, 여자는 접근하고 속삭이며 거짓을 생활화한다. 선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남자의 육신은 분노의 총과 칼로 찢길 것이다. 여자는 그 순간을 위해 자신의 순수를 꺾어버린다.


여자는 점점 거짓에 무뎌지고 배반에 익숙해진다. 무엇을 위함이 아닌 그 자체로서 살아간다. 흔들, 흔들, 그의 심연으로 더욱 깊숙이 파고들수록 여자는 그의 지독한 나약함까지 목격하게 된다. 그렇게 빼앗긴다, 돌려받을 수 없는 마음을. 남자는 전부를 주지 않았는데 여자의 세계는 피보다 진한 혼란의 붉은빛에 취해 눈을 뜰 수 없게 된다.


남자의 불안. 일제 앞잡이 노릇은 그에게 부와 명예를 안겨준다. 냉철하고 신중하며 야비하고 잔인한 그의 겉모습, 자기 자신조차 신뢰하지 않을 듯한 그의 차가움이 지금껏 목숨을 부지하게 만들었다. 조국을 되찾으려는 동족들을 색출하여 고문하고 죽이는 게 그의 직업, 언제 습격당할지 모를 자신을 보호하는데 능하고 필요 이상의 표현은 하지 않는다. 부인은 마작하는 기계일 뿐, 주변의 여자들도 마찬가지다.


이런 그를 ‘남자’로 보는 한 여자가 다가온다. 조용하고 연약하며 은밀하고 노골적이다. 흔들, 흔들, 남자는 결계를 풀어놓는다. 깊숙이 감춰져 있던 뒤틀린 내면의 갈등을 검붉은 욕망으로 내뿜는다. 파괴할 듯 할퀴고 무참히 훼손한다. 가학과 퇴폐를 오가며 짐승처럼 폭주한다. 씻을 수 없는 죄를 욕망의 덫에 걸려 잊고 싶어 했지만, 그는 여자와 달랐다. 그는 되돌아오는 길을 결코 잊지 않았다.


시대가 낳은 자발적 가해자들. 여자는 남자의 운명을 남자는 모두의 운명을 쥐고 있었다. 한 발이라도 잘못 내딛는 순간, 결과는 분명했다. 누가 선택한 파멸이었을까? 마지막 그때, 여자의 한마디는 이별이었다. 사랑과 신분 사이의 갈등이 충돌해버린 파편이었다. 아무도 원하지 않았고 모두가 헝클어져버린 슬픈 결말, 색과 계의 공존은 처음부터 이뤄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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