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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May 31. 2017

겟 아웃, 트라우마에 대하여

조던 필레 감독. 겟 아웃







나만의 기억이 있다. 나만의 상처다. 오직 나만 그 기억에 영향받는다. 타인을 향한 말과 글이 되는 순간 희석된다. 기억은 꺼내지지 않음으로써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내 안에서 보존된다. 감춰진다. 점점 가라앉는다. 들키지 않는다. 잊게 된다. 희미해지고 멀어지게 된다.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 있을 정도까지 된다면 성공이다. 누구도 묻지 않을 거라서 대답할 필요도 없다. 나만의 기억이다. 오직 나만의. 시간이 흐르며 더 깊이 가라앉고 더 멀어진다. 그렇다한들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기억되지 않더라도 사건은 늘 그 시간대에 살아 있다. 기억되는 이상 나는 한달음에 그때 그곳으로 날아가게 된다. 영원한 고통. 벗어나지 못할 거라고, 누구보다 나 자신이 잘 알고 있다.


사라지지 않을 것임으로 치료와 치유의 대상이 아니다. 고통은 사건의 존재에서 비롯된 것이다. 파생된 감정 또한 사건이 있었기에 동시에 돋아난 것이다. 그 이전으로 돌아가 되돌릴 게 아니라면 고통은 현재와 미래의 수명을 보장받는다. 망각은 마약. 잊게 된다.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하게 된다. 그런 기억이 없는 척 웃을 수 있다.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다. 겹겹이 단단하게 묻어놓았기에 건드릴 수 없다. 꺼진 스위치가 켜진다면, 분명 타자에 의한 것이고 의도적인 것이다. 특정 목적에 의해 뇌관을 건드렸다. 치명적인 약점을 쥐고 흔들어 완전히 무력화시킬 수 있도록, 과거에 가둔 채 자신들의 목적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안심하고 너의 뇌를 꺼내어갈 수 있도록.


흑인의 고통은 중요하지 않다. 흑인은 필요와 충족의 대상일 뿐이다. 흑인이 백인의 삶에 이로울 수 있다면 이보다 더한 축복은 없다. 종살이하면서 빌어먹던 것들을 이만큼 거둬줬으면 됐지 그들의 풍요로운 노후까지 보장해줄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건 그들에게 영원한 삶을 선물하는 셈이다. 너희들의 건장한 육체를 원한다. 탄탄한 근육과 젊음을 갈구한다. 흑인 노예를 숙주 삼아 백인 귀족들의 정신과 명예는 위대한 역사를 계속 이어나갈 것이다. 이 어찌나 아름다운 계획인가. 수요만큼 공급이 필요하고, 세상의 길거리에 널린 게 흑인이다. 수십 년 전만 해도 맘대로 때려죽여도 괜찮은 게 흑인이지 않았나. 너희들은 백인들의 새로운 희망이다. 너희들의 육체를 통해 백인들은 영생을 누릴 것이다.


백인들의 끔찍한 욕망이 한 흑인 청년(다니엘 칼루야)이 감췄던 고통의 스위치를 켰다. 켜지는 순간, 나락으로 떨어졌다. 도려낸 과거가 되살아 났다. 엄마를 죽인 건 나야. 나는 아무것도 안 했고 엄마는 차가운 길바닥 위에서 고통 속에 신음하며 죽어갔어. 내가 그렇게 만든 거야. 나는 어렸고 무서웠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에 엄마는 그렇게 죽은 거야. 엄마는 살 수 있었어. 하지만 내가 죽인 거야.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내가. 트라우마의 사슬이 온몸의 숨통을 쥐어짠다. 피를 피로 되갚으며 도망가는 순간에도 과거의 망령이 뒷덜미를 후려 친다. 엄마를 두 번 죽일 수 없어, 구해주자. 목숨을 걸고 구한 피투성이 흑인은, 나의 과거는, 엄마의 또 다른 분신은, 악마였다. 죽은 엄마가 현재의 악마가 되어 죽음으로 이끌고 있었다.


백인 여자 친구(앨리슨 윌리암스)를 사귀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어떤 가설도 현재의 개판을 무마시켜줄 수 없다. 모든 여정이 계획이었다. 너를 죽여야 우리가 살 거든. 너는 죽어도 되니까. 너는 흑인이니까. 사랑해라는 말은 그물이자 덫이자 낭떠러지였다. 내가 널 잡아오면 우리 엄마(캐서린 키너)가 너의 정신을 파괴하고 우리 아빠(브래드리 휘트포드)가 너의 육체를 조각낼 거야. 미리 말해줬다면 나는 널 진작에 죽였을 텐데. 사랑을 믿고 멀리도 따라갔던 흑인 청년은 죽어가는 여자 친구의 유언과 마주한다. 그리고 무시한다. 차가운 길거리에 버린다. 그렇게 엄마를 버렸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과거와 극적으로 화해한다. 구원은 가장 끔찍한 순간에 찾아온다. 제 발로 들어온 지옥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으며 획득한다. 적극적으로 벗어남으로써 엄마를 고이 보내준다. 자신의 과거를 용서한다. 그렇게 트라우마에서 더 멀리 벗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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