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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Jul 03. 2017

공각기동대, 조작된 기억들

루퍼스 샌더스 감독.  공각기동대 : 고스트 인 더 쉘






변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믿음을 의지하고 싶을 때가 있다. 불안한 확신. 마지막 희망 같은 것. 직립의 순간에도 발을 디딘 곳이 땅인지 공중인지 꿈인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적어도 아주 먼 기억 속 저편에 이런 현실로부터 왔어 같은 아득한 믿음. 나는 거기서 온 게 확실해. 그래서 지금의 내가 겨우 이렇게 남아 있는 거야. 내가 인지하고 있는 진짜, 한 줌 같지만 그나마 겨우 나일 수 있는 것. 그게 자신의 본질이자, 순수한 토대, 오염되지 않은 마지막 보루라고 여기게 된다. 간절함. 이게 아닐 수 있다는 가정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게 아니라면, 이마저 아니라면 나는 정말 내 생애는 통째로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메이저(스칼렛 요한슨)의 아킬레스 건이었다. 거대 기업이 만든 미래 수익사업의 중심에서 메이저는 자신에 대해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기계 안에 들어있는 뇌에 저장된 데이터는 그녀가 난민의 자녀라고 설명했지만 난입되는 혼란과 그녀의 학습된 정보와 다른 반응을 보이는 낯선 여인을 통해 메이저는 의심한다. 증폭되는 불안을 막지 못한다. 물리적 폭력으로 해갈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기억의 세포는 뇌의 총면적을 넘어 온몸으로 번져가는 듯했고 온갖 특수합금으로 만들어졌을 피부와 근육 하나하나에 각인되는 것처럼 아팠다. 몸과 마음이 분리된 현재의 자신처럼, 점점 어색한 현실의 움직임들. 의심은 행동으로 이어진다. 


슈퍼 컴퓨터의 CPU가 대신 자리했다면 미래에 어떻게 인간들을 몽땅 제거하고 신세계를 구축할지 플랜을 세웠을지 모른다. 하지만 인간의 뇌를 지니고 있기에, 연어처럼 전부를 걸고 과거로 회귀하려 몸부림친다. 외형의 디자인을 빼면 몽땅 기계이면서 인간의 흉내를 내고 있었다. 어디로 갈지도 모르면서 어디서 왔는지 몹시도 궁금했다. 과거가 미래를 정의하려 하고 있었다. 공허해지는 현재를 채우려 과거의 진실이 소환되고 있었다. 미래는 저절로 완성될 것 같았다. 지금은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아서 그저 자꾸 뒷걸음만 치고 싶게 만들었다. 


전부를 걸고 처음으로 돌아가려 한다. 기억에 대한 불신이 이토록 무섭다. 제자리가 아니라 퇴보를 자청한다. 폭로된 진실과 마주한다. 지금 기억은 타인의 조작에 의해서 설정된 거야. 너(나)는 기억 속 이미지와 전혀 다른 곳에서 전혀 다른 의도로 여기까지 왔다. 리셋. 정체성이 이토록 어렵고 무서우며 길이 없다. 자신을 정의하지 못하는 인격체는 자신을 스스로 움직일 기운을 얻지 못한다. 기계이기에 입력된 행로로 창문을 부수거나 살상 대상을 향해 총을 난사할 수는 있겠지만 막상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경로는 아무것도 없다. 불가능하다. 내가 누군지 어떤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현재의 정의는 원래의 내가 누구였냐에 따라 좌우된다. 기억의 조작에 대한 팩트와 마주하는 순간, 메이저는 제거대상으로 지정된 적(쿠제, 마이클 피트)에게서 동질감을 느낀다. 버려지고 빼앗기고 끝내 폐기될 운명. 그동안 자신을 둘러쌌던 허상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된다. 처음을 향해 끝까지 돌아가 보기로 한다.  


영화는 (비주얼 언어의 산물이라는 기대의 극점에 가닿지 못하고), 이미 전설처럼 회자되는 원작을 극적으로 재현하는 데 성공하지 못한다. SF지만 현실적이어야 했고, 철학적이지만 이 또한 현실세계에 대한 현대인의 인식과 맞닿아있어야 했지만 겨우 움직이는 만화 페이지에 그치고 만다. 스칼렛 요한슨의 슈트는 말 그대로 무대의상 같은 느낌에 그친다. 연극 같아 보이기도 했다. 일부러 거칠게 만든 싸이버 펑크의 실험작 같아 보이기도 했다. 메시지만 겨우 꿈틀대고 있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난 지금 여기에 왜 있는가. 이 모든 질문의 답을 겨우 얻어내고 나서야, '광대한 네트'의 다음 관문을 향할 수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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