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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Aug 17. 2017

여교사, 파멸의 열등감

김태용 감독. 여교사






경제적 지위에서든 사회적 지위에서든 계속 낮아지다 보면 스스로에게까지 낮아지게 된다. 효주(김하늘)가 그랬다. 언제 자리를 비워야 할지 모를 기간제 교사 신분, 10년 동안 진척 없는 연애, 작은 자동차, 겹겹이 쌓여가는 업무, 그만큼의 피로,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삶, 덩달아 자신에게까지 점점 하찮게 느껴졌다. 공부만 했는데 돌아오는 결과란 이런 것들이었다. 보다 나아진 것은 많지 않아 보였다. 이런 효주 앞에 재하(이원근)는 제자도 학생이 아니었다. 빛이자 별, 기대이자 미래였다.


갑작스러운 키스도 상관없었다. 재하의 그늘은 효주에게 위로였다. 자신이 돌볼 수 있게 된 대상이 있어 자신조차 돌봐질 수 있었다. 비로소 어떤 완충장치가 생긴 것 같았다. 매일 지저분한 개새끼처럼 쌀만 축내고 집만 어지럽히는 남자 친구 상우(이희준)와는 달랐다. 하지만 다시 작아져야 했다. 혜영(유인영)이 나타나서. 학교 이사장의 따님이었다.


모두가 혜영 앞에 알아서 굽히고 모셨다. 비싼 옷, 화려한 메이크업, 순진하기까지 보이는 눈과 표정, 세상 물정 모르는 말투, 뒷자리에 타면 알아서 모셔다 주는 대형 세단까지, 효주에게 혜영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의 총합이었다. 효주가 날 때부터 원했던 것을 혜영은 모조리 쥐고 있었다. 말끔한 외모와 슈트로 무장한 혜영의 남자 친구(이기우)에게 화장품 선물을 받은 날, 효주는 폭발한다. 동정받고 있다는 생각에 쇼핑백을 와장창 집어던진다.


혜영에겐 적의가 없었다. 보이지 않았다. 적의 같은 게 필요 없었다. 자신보다 더 가진 자가 누군지 몰랐고, 알 필요도 없었으며 욕심도 없었다. 싫증 나면 버리면 그만이었다. 효주가 먼저 가지고 싶었던 재하처럼. 재하, 젊은 남자, 가꿔서 숙성시킬 수 있는 것. 혜영의 것 중 효주가 유일하게 뺏을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하지만 애초 불가능했다. 처음부터 혜영의 장난감이었으니까.


가르치던 학생에게 또 같이 살던 남자 친구에게 씨X년 소리를 듣던 효주의 자존감이 유일하게 따스해지는 순간이 재하와 같이 있던 순간이었다. 교사의 윤리고 뭐고 재하와 때와 장소를 안 가리고 몸을 섞었다. 혜영을 비난할 수 있었던 유일한 지점은 반대로 말하면 자신이 가장 간절히 원했던 지점이기도 했다. 재하를 독점하고 재하를 탐닉하고 재하를 돌보면서 재하를 자기 것으로 자신을 재하의 것으로 만드는 것. 일거양득이라 여겼을 것이다. 상대에게서 빼앗아 자신이 갖는 것. 하지만 이조차도 악몽이었다. 음모였고 비극이었다.


단 한순간도 재하는 효주의 것이 아니었다. 모든 순간 혜영의 영역 안에서 둘은 놀고 있었고, 혜영의 지휘 아래 효주가 발을 딛던 바닥이 흔들리고 있었다. 혜영은 효주의 숨통을 쥐어짜고 있었다. 효주는 만인이 보는 가운데 혜영 앞에 무릎 꿇는다. 먹고살아야 했고 살아남아 재하를 하루라도 더 봐야 했을 것이다.  혜영은 효주를 보듬고 하녀처럼 부리며 (네가 그렇게 탐하던) 재하를 곧 버릴 것이며 (재하에게 전해 들은) 재하를 진짜 원했던 효주의 진심을 비웃는다. 효주는 끓어오른다.


자신의 진심은 비웃음의 대상이 아니었다. 생계를 위해 무릎 꿇을지 언정 재하에 대한 고결한 사랑이 조롱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 최소한 재하는 자신에게 그렇게 말하면 안 되었다. 효주는 끓어오르는 심정으로 끓어오르는 주전자를 들고 혜영의 얼굴로 가까이 간다. 심판한다. 부글부글 끓어올랐을 피부를 초연하게 지켜보며. 재하 역시 가만 놔두지 않는다. 영원히 잊지 못할 이미지를 각인시켜 준다. 사랑과 죽음의 얼굴. 그렇게 모두가 파멸한다. 공멸이었고 자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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