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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Oct 12. 2017

더 테이블, 결국 헤어지는 사람들

김종관 감독. 더 테이블




한때 사랑했던 여자와 남자

한번 사랑했던 여자와 남자

사랑을 위장하는 여자와 여자

한번 더 사랑을 망설이는 여자와 남자


작은 테이블만큼의 간격을 두고

딱 그만큼 서로 다른 우주에서 더 움직이지 않는다.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감정의 화학작용들


한 남자(정준원)는 과거 여친(정유미)을

찌라시로 전락시키며 조롱하고 있었고

한 남자(전성우)는 갑자기 떠나버렸던 여자(정은채)에게

해외에서 집어온 물건들을 내밀며 용서를 구하고 있었고

한 여자(김혜옥)는 어린 비즈니스 파트너(한예리)에게서

죽은 딸의 모습을 찾으며 그리움을 표출하고 있었고

한 남자(연우진)는 집요하게 매혹하는 과거 여친(임수정)에게

영원한 이별을 선언한다.


말보다 더 많은 말을 하는 표정들

말보다 더 많은 감정을 전하는 침묵들

섞일 듯 섞이지 않고 각자 흐르는 시간들

찻잔은 끊임없이 채워지다 치워지고

테이블엔 다른 이들이 번갈아 자리를 채운다.


몇 가지 물음들이 난입한다.

뭐 저런 새끼가 다 있어서 한때 사랑한다고 속닥거렸을 상대방을

한낱 싸구려 관심거리로 만들어버릴 수 있을까.

몇 달 연락 끊고 갑자기 불러내 온갖 허세로 자신을 치장하다가

널 위해 사 왔다며 포장 없는 물건들을 내밀면

다시 밤을 지새울 연인으로 회복될 수 있는 걸까

어떤 사연이 사장을 후리려다가 가난한 직원과 눈이 맞아

가난한 결혼으로까지 결심하게 만드는 걸까.


제대로 된 답이 있을 리 없다.

타인의 사연들은 상황과 감정, 기억과 오해가 뒤섞여

납득하기 어려운 '변명을 위한 변명'으로 오염되었을 테니까.


가장 흥미로운 반응은 네 번째 커플의 남자였다.

불나방 같이 과거의 중력을 향해 날아드며

끊임없이 자신과 상대방을 연소시키려는

전 여자 친구의 온갖 도발과 유혹, 제안과 무너짐 앞에서  

흔들리다가 정신 차리다가 흔들리다가 단호해지는 모습이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호기로워 보였다.


반복하기 싫으니까 단호해질 수 있었겠지.

대안이 없어도 결정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결국 자신을 설득할 수 있는 무기들은

과거의 비극과 지긋지긋한 감정 낭비의 파편들에 대한 회상일 테다.


멋쩍어하며 다시는 안 볼 거라는 여자의 선언을 들으며

둘은 반드시 다시 만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도 바람도 어떤 사회적 제약도 상관하지 않는 여자에게

약속이란, 약속을 담은 말이란 언제든 바뀌고 그게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걸 알았을, 이미 독하게 경험했을 남자는 그래서

단숨에 등을 돌릴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기약 없는 약속을 잡으며

같은 장소로 이동하며

다음 미팅을 약속하며

반대쪽으로 이동하며

테이블을 떠나는 사람들.


커피와 차를 만들고

테이블을 치우는 여자는

오가는 모두의 이야기를 듣고서

어떤 간섭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테이블은 변함없이 유지되고

변하는 건 자리를 오가는 사람들뿐이다.

테이블을 치우는 여자는 절대적 지위에서 

모든 것을 관망하며 침묵한다.

마치 신과 같이. 모든 것을 아는 듯 하지만

심각할 정도로 관여하지 않는다.


사연의 유통기한을 관리한다.

차를 준비하며 기다리는 순간부터

자리를 뜨며 테이블이 치워지는 순간까지

흔적이 없어 다시 채워질 수 있다.

관객들은 테이블을 치우는 여자의 시점이 된다.

모든 것을 듣고 다시 잊고 새로운 사람들의 표정을 살피는.

관여할 수 없는 일방적인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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