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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Nov 08. 2017

조용한 남자의 분노, 절대 용서하지 않는 남자

라울 아레발로 감독. 조용한 남자의 분노 







범죄자의 관점으로 보석상을 털다가 인명피해가 나는 일은 예상 가능하다. 무장을 했고 서두르지 않으면 출동한 경찰에 붙잡힐 수 있으며 자신들의 신변을 확신할 수 있는 모든 증거(증인)를 최소화시켜야 한다. 감정이 섞일수록 속도는 더뎌질 것이다. 냉철한 리더가 필요하지만 모든 무리들에게 균등한 비율로 있을 리가 없다. 방해라고 여겨지면 폭력이 뒤따른다. 방해물은 피범벅이 되었고 범죄자들은 현장에서 달아난다. 


피해자의 관점으로 보석상에서 강도를 마주하는 일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일이다. 결혼을 준비 중이었던 여자는 강도들이 시키는 대로 납작 엎드려 있었지만 도망가는 한 강도의 눈에 띄어 총기로 잔혹 무도한 공격을 받는다. 여자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혼수상태 끝에 사망했다. 


영화는 그녀와 결혼을 준비 중이던 남자 호세(안토니오 데 라 토르레)의 여정을 따라간다.


10여 년이 지났다. 범인들의 흔적을 좇아 같은 테이블에서 카드를 치고 있는 호세. 누구도 호세의 정체를 모른다. 아무 소리 없는 입, 아무 감정 없는 눈, 아무 표정 없는 얼굴. 호세는 카드를 치는 무리 주변의 한 여자와 몸을 섞는다. 남편은 오랜 수감 중이었고 면회 중 관계를 가진 후 생긴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 남자가 출소했고 호세와 아내의 관계를 의심한다. 호세는 남자(루이스 칼레조)에게 접근한다. 얻어맞아 망가진 얼굴로 자신이 여기까지 온 이유를 나직이 전한다. 호세는 10년 전 그 사건 이후로 늘 절벽 위에 서 있었다. 여자의 남편은 그 사건에서 운전 중 붙잡힌 공범이었다. 직접적인 살인자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용서의 대상이 될 수도 없었다. 여자의 남편은 호세의 요청에 따라 남은 범인들에게 그를 안내한다. 


오랜 시간이 지난 일이었다. 보석상 강도들은 각지에서 범죄가 아닌 다른 일로 잘 지내고 있었다. 평범하게 잘 지내고 있었다. 호세가 약혼자를 잃고 분노에 몸서리치는 동안 범죄자들은 각자의 삶을 꾸리며 잘 지내고 있었다. 친구들도 있고 아내와 함께 아이도 키우면서. 호세와 죽은 여자 친구가 누려야 했을 삶이기도 했다. 이 당연한 것들이 지금 호세에겐 없었다. 빼앗겼고 눈물과 함께 사라졌다. 사라진 생명은 돌아오지 않았다. 죽기 전의 연인의 슬픈 표정만 강렬한 인장으로 명징하게 남아 있을 뿐, 호세는 칼을 들고 범인 중 한 명의 목을 찌른다. 정확하고 치명적으로. 호세는 준비한 총을 꺼내 범인 중 한 명의 얼굴에 총구를 쑤셔 박는다. 아이와 아내가 있는 범인의 사정에도 동요하지 않는다. 천천히 총구를 기울이고 방아쇠를 당긴다. 호세의 표정은 바뀌지 않는다. 호세는 준비한 총을 들고 범인의 가게로 들어간다. 범인의 어린 딸은 테이블에 팔을 베고 자고 있었다. 호세는 주저하지 않고 방아쇠를 당긴다.


영화는 복수의 의미를 설명하지 않는다. 허무함과 끝난 후에도 돌아오지 않는 것에 대한 회한을 부각하지 않는다. 마치 오래 다닌 회사를 정리하고 나오 듯 차를 타고 떠나는 호세의 뒷모습만 넌지시 바라본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거라는 게 호세에게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은 이미 완전히 바뀌어버린 후였기 때문에, 주변과 이후에 무엇이 어떻게 되든 관여의 대상이 아니었다. 호세는 격정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감정도 행동도 어느 하나 거칠게 다루지 않는다. 복수라는 일념 하나에 휩싸여 광분하거나 저주를 퍼붓지 않는다. 타고난 킬러도 잠재된 본능의 소환도 아니었다. 호세는 묵묵하게 집중하고 처리한다. 수반되는 자질구레한 일을 하나하나 차분하게 수행해 나간다. 그리고 결정적 순간이 되었을 때 '아내와 아이가 함께 하고 있다는' 감정적 변화를 일으킬 만한 변수 앞에서도 계획을 바꾸지 않는다. 방아쇠를 당긴다. 온몸에 피가 묻는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한다. 


억제와 절제가 아닌, 충격에 기능을 잃어버린 건 아니었을까. 연인의 죽음이 표출할만한 감정마저 앗아가 버린 건 아닐까. 남은 자의 고통이란 설명되지 않는 일이다. 직접 안겨줌으로써 기울기를 바로 잡는다. 복수는 한 명이 아닌 한 세계를 향한다. 나의 세계가 파괴되었고 당신들의 세계 역시 그렇게 되어야 공평해진다. 호세는 균형을 위해 끝까지 멈추지 않는다. 자신이 잃어버린 것들에 전념하고 상대에게 빼앗아갈 것들에 전념한다. 오랫동안 준비한 업무처럼 완료한다. 추모는 끝났다. 남은 자들의 고통은 비로소 동일한 스코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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