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승권 Nov 03. 2017

단지 세상의 끝, 시한부 동성애자의 마지막 침묵

자비에 돌란 감독. 단지 세상의 끝

충격은 변화를 이끈다. 12년 만에 집에 가고 싶어 졌다. 비행기를 타고 엄마, 형과 형수, 동생에게 날아간다. 나는 동성애자고 나(루이. 가스파르 울리엘)는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그들을 보러 간다. 사랑하고 미워하는 나의 가족들을.


소란스럽게 반겨주었다. 동생(쉬잔. 레아 세이두)은 어색하게 화장을 했다. 엄마(나탈리 베이)의 따스한 눈웃음은 여전하다. 형수(카트린. 마리옹 꼬띠아르)는 다정하기 이를 데 없다. 형은, 형(앙투안. 뱅상 카셀)은 화를 낸다. 등을 돌린다. 말수가 적고 적의와 짜증을 드러낸다. 그가 내게 왜 이러는지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지만 까닭을 묻지 않는다. 나는 이곳에 따지러 오지 않았다. 


한 테이블에 모여 식사를 한다. 멀리서 보면 그림 같은 풍경. 풍성한 식탁을 둘러싼 장성한 자식들과 화려한 의상을 걸친 진한 화장의 엄마. 곧 어색한 분위기가 감돈다. 나는 예전 집에 가고 싶다고 했다. 모두 만류한다. 돌이키기 싫은 가난의 기억,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고난의 장소. 하지만 내겐 첫 경험이자 첫사랑과 만난 곳폐허를 손끝으로 만지며 기억을 떠올린다. 건조하 말투로 형이 전한다. 그(피에르. 앙투안느 데로쉬에)는 죽었다고. 그동안 그의 소식을 묻지도 찾지도 않았다. 강물을 거슬러 오르듯 처음의 지점으로 애써 돌아왔더니 그는 죽었고 가족들은 하나 같이 어색하다.


엄마가 조용히 부른다. 너를 이해할 수 없지만 너를 사랑한다고. 형의 폭언과 폭력적 태도를 이해해달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형수는 나를 안는다. 그녀는 나를 자기와 같은 이방인으로 인식하는 것 같다. 아마 자신보다 더 거리감이 형성된 타인. 어쩌면 남은 생 내내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이상하지 않았을 사람. 나는 시계를 본다. 이들에게 말해야 한다. 내가 곧 죽는다고. 당신들 사이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아마 당신들보다 훨씬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될 거라고. 나는 아마 이들의 반응과 표정을 보고 싶어서 이곳에 온 것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틈이 없다. 이들은 내가 오기 전부터 그랬던 듯, 온통 혼란스럽고 고성과 분노와 짜증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엄마가 시킨 거짓말을 했다. 동생의 기분이 좋아졌고 엄마는 웃는다. 아마 내 역할은 여기까지 인 듯. 다시 분위기는 혼돈으로 치닫는다. 나와 같은 성별, 나와 같은 엄마의 배에서, 나보다 먼저 태어난 형은 나의 존재를 부정하고 저주하며 지우고 싶어 한다. 더 이상 이곳에서 견딜 수 없다. 


애초 목적은 마지막 인사였다. 그건 당연하게도 협의하지 않은 부분이었고 이들은 내가 여기온 목적보다 내가 나타났다는 당혹감으로 하루를 잡아먹고 있다. 나의 일부, 부정할 수 없는 내 생의 조연들. 돌아선다. 말하지 않아도 나는 인사를 했다. 다시는 볼 수 없겠지만 다시 보더라도 오늘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시 볼 수 없겠지만 그들은 아무렇지 않을 것이다. 내가 없어도 그들은 괜찮았고 그들이 없는 동안 나는 세상의 지면을 장식하며 유명해졌고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내가 죽는다고 세상이 끝날 것도 아니다. 나는 나대로 사라지고 그들은 그들의 삶을 산다. 안녕 엄마 형 동생. 사랑하고 미워하는 나의 사람들. 




매거진의 이전글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불꽃놀이를 끝내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