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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Nov 16. 2017

빌리언스, 괴물 VS 괴물

데미안 루이스 VS 폴 지아마티. 빌리언스








생존을 위해 산다는 말은 지루하다. "살려고 이렇게 사는 거야." 불한당에서 한재호(설경구)가 조현수(임시완)에게 했던 말도 마찬가지다. 반복 강조되는 절박함은 주체와 주변 모두를 소진시킨다. 중요한 거 알지만 그래서 뭐 어쩌라고, 누가 그걸 몰라서 이러고 사나 같은 심정도 든다. 얼굴에 달린 눈은 나를 향해 있지 않다. 보이는 모든 것들이 나와 현재에 연결될 필요는 없다. 일정한 거리감은 숨 쉴 여지를 준다. 초월을 (이론과 지식뿐 아닌) 경험하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린다. 모든 기준을 허무는 일, 아랑곳하지 않는 것, 구경만으로도 해소감이 넘실거린다. 나와 나의 우리가 그을리지 않는다면 불구경은 아무래도 그만이다. 픽션이라면 더더욱.


억만장자 해지펀드 매니저 바비 액셀로드(데미안 루이스)

뉴욕 남부지방 연방검사장 척 로즈(폴 지아마티)


바비 액셀로드는 억만장자다. 돈으로 돈을 버는 세상에서도 가장 탑에 속한다. 방식은 사법체계를 건드리지만 다양한 거액 기부와 홍보활동을 통해 사회적 지위까지 확보한다. 미국 역사상 가장 거대한 비극에 속하는 911이 그의 기회였다. 동료가 모두 죽고 그는 홀로 남아 모조리 쓸어담았다. 비난은 거셌지만 돌파했다. 언론과 업계에서 유명인이 되었다. 매 분기별 수조에 달하는 자본이 고객사과 액셀로드의 덩치를 키우고 있었다. 단지 운이 좋은 남자의 케이스가 아니었다. 바비는 자신에게 닥친 기회를 악마적으로 끌어올려 월스트리트의 제우스로 군림하고 있었다.


척 로즈는 바비가 불편했다.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자주 받는 검사장으로서 바비의 손목에 수갑을 채울 수 있다면 커리어의 정점에 설 것이 분명했다. 바비의 가장 가까운 동료 중엔 웬디 로즈(매기 시프)가 있었다. 척 로즈의 아내. 바비와 웬디 사이에는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척, 바비, 웬디, 바비의 아내 라라(말린 애커맨)까지 알고 있었다. 사내 심리상담가로서 웬디가 바비에게서 받는 월급과 성과급은 척의 공무원 월급보다 훨씬 높았다. 척에게는 열등감의 일부였다. 자신보다 나은 아내가 자신보다 높은 수입을 벌고 자신보다 돈 많은 남자와 아주 가깝다는 사실은 바비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척의 내면으로부터 바비에 대한 적대감은 커져 가고 있었다. 직업적 소명의식을 넘어 수컷으로서의 질투심이 바비를 수사대상으로 두는 데 거대한 근거로 작용하고 있었다. 바비는 척을 회유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다각도로 시도해본다. 그로 인해 척은 더욱 단단해진다.


대결구도가 고조되면서 바비와 척은 서로를 말살 대상으로 규정한다. 사이에 웬디가 얽혀 있었고 서로를 향한 음모가 오갔으며 라라의 질투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요소였다. 내사가 진행되고 수백 개의 소송이 이어지며 척은 궁지에 몰리고 직장과 가정 모두에서 쫓겨낼 위기에 처한다. 바비 역시 거대한 투자 건이 척에 의해 무산되면서 분노한다. 각자의 생을 지탱했던 부분들의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고 모든 공격력이 투여되고 있었다. 척은 보유한 현재 자산과 건드리지 말아야 했던 미래 자산까지 모조리 쏟아붓는 투자건에 참여하고, 바비는 조작과 비리를 통해 모든 것을 빼앗는다. 주가 그래프는 하루도 지나지 않아 천국에서 지옥으로 곤두박질치고 척과 척의 친구와 척의 아버지가 지닌 자산은 증발된다. 현재와 미래의 자산이 완전히 사라진다. 친구는 욕을 퍼붓고 척의 아버지는 자식과의 인연을 끊기로 한다. 척은 다 잃는다. 바비에 의해. 웬디와 별거 중이었으니, 아무도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법조계를 넘어 정계를 넘보는 중이었다. 길은 까마득했다.


바비가 끝내 웃을까. 친구는 없었고 모두가 적이었다. 하나뿐인 친구는 적의 아내, 나머지는 모두 진심을 드러내선 안될 타자였다. 돈 없인 신뢰도 없었고 어떤 관계에서든 배신은 수순이었다. 생애 가장 골치 아픈 적의 고난을 바라보며 승리의 잔을 다 비우기도 전에 바비의 손목엔 수갑이 채워지고 있었다. 바비는 금융계의 프랜시스 언더우드(케빈 스페이시. 하우스 오브 카드)였다. 어려운 어린 시절을 지나 자본권력의 정점까지 올랐고 룰을 만드는 자가 되었다. 이성과 감정의 구분은 의미 없었다. 사회적 지위와 자신이 인지한 지위를 일치시킨 이상 반대하는 자는 설득이 아닌 제거가 답이었다. 척은 그 중심에 있었고 둘은 끊임없이 분투하고 서로를 망가뜨리며 스스로 무너진다. 덫이 난무했고 자멸 또한 덫이었다. 패배자의 가면을 쓴 채 뼈와 살을 부서뜨리며 달려오는 척에게 바비는 손목을 내어준다. 하지만 법은 돈을 살 수 있었고 게임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삶을 게임으로 보는 관점은 너무 피곤하다. 재미가 곁들여지지만 판돈과 승부욕이 커질수록 게임은 손목이 날아가도 발을 뺄 수 없는 도박이 된다. 돈만 아니라 지금까지의 생애 전부를 걸어야 할 수도 있다. 소박하게 지지되고 있던 지금껏 이룬 것들이 단숨에 사멸할 수도 있다. 알지만 멈추지 못하고 멈추고 싶을 땐 이미 불가능하다. 복수에 대한 중독, 감히 자신을 건드렸다는 상처 입은 자존감, 동반하며 치솟는 쾌락 지수. 척과 바비의 대결은 미국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선정적인 쇼다. 이 쇼로 인해 실제로 누구의 삶이 무너졌고 죽어 없어졌는지는 절대 보여주지 않는다. 합법과 불법은 돈이 좌우하고 더 큰 자본의 축적을 기꺼이 법이 돕는다. 대리만족은 이렇게 보통의 삶들(빌리언스의 시청자들)의 여가시간을 지탱한다. 드라마가 끝나면 우리는 모두 현실로 돌아간다. 내가 바비였으면, 내가 척이었으면 하고 불가능한 공상에 쓴웃음을 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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