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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Nov 23. 2017

오리엔트 특급 살인, 악마여, 그 열차에 타지 마오

케네스 브래너 감독. 오리엔트 특급 살인





당혹스러워한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다는 말을 하는 동안에도 신체의 생명력은 줄어들고 있다. 막을 수 없는 일. 노화는 숙명이고 죽음은 중간에 내릴 수 없는 종착지다. 변수를 최소한으로 억제한 삶이더라도 자연적 노화를 획기적으로 늦출 수 없다. 배움과 소문으로 인지하고 몸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느끼게 될 무렵부터 절감하게 된다. 나도 역시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된 사람이라는 점을. 조금 씁쓸하고 서글프면서도 받아들이게 된다. 어른의 자격은 그렇게 입혀진다. 


죽음이 자연스럽게 찾아오지 않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측불허의 천재지변, 불운의 교통사고를 통해 지인의 죽음을 겪으며 생의 허망함을 절감하게 된다. 내 차례도 이렇게 올 수 있겠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 정신이 망가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서둘러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태도로 갈아 끼워지게 되지만 가까운 죽음은 충격파가 깊다. 이겨낼 수 있는 죽음이란 적다. 잊히는 죽음이라면 몰라도. 


아이의 살인자가 본명과 신분을 위장한 채 열차에 오른다. 같은 시간 12명의 사람들이 아이의 살인자와 같은 열차에 오른다. 모두 죽은 아이와 연결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살인자와 같은 열차에 오르기로 작정한 순간부터 사람이기를 포기하고 있었다. 아이를 잃은 슬픔과 분노, 충격과 절망을 대체할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최소한 같은 땅 위에서 아이의 숨을 거둔 자와 함께 숨 쉴 순 없었다. 승객들은 하나의 목적으로 열차에 오르고 살인자의 시간과 공간을 둘러싼다. 승객들에게 아이 살인자는 악마였다. 악마가 탄 열차에서 사람으로서 존재하기를 포기해야 했다.


수상했던 밤이 지나고 살인자는 난자된 채 발견된다. 깊이가 다른 칼자국이 흉부에 몰려 있었고 온통 피에 젖은 채 누워 있었다. 머리맡에 권총은 잡지도 못했을 정도로 몸은 이미 마비되어 있었다. 찻잔에 남은 수면제와 부서진 시계, 불에 탄 메모, 떨어진 손수건, 증거들이 난무한다. 무임승차한 탐정은 사건을 맡지만 탐문할수록 미묘한 공기를 감지한다. 그날 밤 칼을 든 승객들이 살인자의 방에 몰려가 그 좁은 객실 안에서 누운 채 꼼짝도 못 하는 살인자를 살인했다. 찌르고 찌르고 찌르며 죽은 아이와 같이 죽어가던 자신을 향한 피의 의식을 치른다. 아이는 돌아오지 않고 남은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은 아이를 그렇게 만든 악마의 존재를 지상 위에서 지우는 것이었다. 


쾌감이 있었을까. 어떤 복수의 실행도 상실의 슬픔을 넘어설 수는 없었다. 다만 손녀를 잃고 딸을 잃고 돌보던 아이를 잃고 존경하던 분을 잃어야 했던 자들은 기꺼이 살인자가 됨으로써 자신을 훼손함으로써 먼저 떠난 자들에 대한 존중을 표한다. 스스로의 죄책감을 더는 일이었다고 변명해도 결과는 같았다. 먼저 죽은 아이와 이제 죽은 악마의 무게는 다르지만 이로써 남은 자들은 기울어졌던 생의 균형을 아주 조금이나마 되찾았다. 


법은 신의 판단을 대행하기 위해 인간들이 만들었지만, 법의 한계는 사건의 수만큼이나 매번 명확하다. 법은 복수의 방식이 아니며 법은 감정의 해소 도구가 될 수 없으며 법은 그저 원칙을 통해 세상의 표면을 보다 균일하게 다듬으려 할 뿐, 개인과 집단의 상처를 보상하지 못한다. 법은 선을 긋는 도구지 애초 잘 벼려진 칼이 아니었다. 모든 추리를 끝낸 탐정 역시 자신의 완벽주의와 직접 마주한다. 하지만 그의 원칙 역시 아이의 죽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으니까. 악마의 살인자들에게 더 이상 죄를 묻지 않는다. 탐정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일에 관여할 뿐 악마의 죽음에 대한 혐의를 물을 정도로 신에게 가까운 자가 아니었다. 열차가 멈추고 나서도 남은 자들의 삶은 계속되어야 했으니까. 탐정은 자신의 원칙을 깨고 무리를 떠난다. 로맨스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말은 탐정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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