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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Dec 20. 2017

위대한 쇼맨, 상술과 열정 사이

마이클 그레이시 감독. 위대한 쇼맨






어린 바넘이 현실의 벽을 피부로 실감한 건 호감 가는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가 그걸 지켜본 소녀 아버지한테 귀싸대기를 맞았을 때였을 것이다. 계급. 가난한 재단사 아버지를 따라온 곳이었다. 바넘의 아비는 곁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아비의 자존심을 내세웠다가 자칫 일을 날리고 가족을 굶길 수도 있기 때문에. 어린 바넘이 붉어진 뺨으로 이를 악물며 피의 복수를 꿈꿨다면 희대의 연쇄살인범 후보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넘이 좋아하게 돼버린 소녀는 이를 물질적 성공과 계급 상승을 향한 장작이 되어주었고 훤칠한 휴 잭맨으로 성장한 바넘은 대궐 같은 소녀 집 대문을 두드린다. 미셸 윌리엄스로 성숙해진 그녀를 데려가겠다며 특유의 배짱을 들이민다. 어린 소년의 귀싸대기를 갈겼던 장인은 혀를 끌끌 차며 보내준다.


바넘이 다니던 회사가 부도난다. 집에는 아내와 두 딸아이가 목 빠지게 기다리는 중이었다. 살림살이는 빠듯했지만 그래도 행복해...라는 미소를 잃지 않던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의 직장이 날아가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남편에 대한 신뢰는 견고했지만 불안은 현실이었다. 현실이 이번엔 바넘 한명이 아닌 가족과 살림살이 전부의 귀싸대기를 날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바넘은 미소와 응원을 보내는 아내와 자녀들을 뒤로 한채 도망칠 수 없었다. 그는 확인이 어려운 허술한 담보를 제시하며 거액 대출을 한다. 사람들에게 전시장을 대여해 신기한 물건들을 보여주며 관람료를 받기로 한다. 성공의 구질은 까다로웠다. 첫 타석에 선 바넘은 투 아웃까지 몰린다. 전략을 바꾼다. 바넘은 사람을 모은다.


거리에서 봤다면 한 번 정도 뒤돌아봤을 듯한 캐릭터들. 난쟁이 같은 체구, 거인 같은 키, 털북숭이 여성 등 세상 신기해 보이는 기인들을 모집하고 그들과 함께 쇼를 기획한다. (이 지점은 휴 잭맨은 자비에 교수, 기인들은 갓 합류한 엑스맨 패밀리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냥 보여주는 것을 넘어 스토리와 움직임을 만들고 크고 사나운 동물도 모으고 불도 내뿜으며 천막 안을 화려한 열기와 놀라운 눈빛으로 채운다. 반응은 뜨거웠다. 사람들은 앞다투어 지갑을 열며 바넘과 기인들의 쇼를 보러 줄 선다. 성공. 바넘의 친 공은 현실의 펜스를 가뿐히 넘긴다. 하지만 거기서 멈출 수 없었다. 어릴 적 맞은 귀싸대기의 쓰라림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더 판을 키워야 했다. 바넘이 노리는 것은 단순히 돈을 쓸어 담는 게 아니었다.


바넘의 서커스는 대중의 열광적 지지를 넘어 상위 계급의 시야 안에까지 진입한다. 쇼가 열리기 전 파티에 초대받는다. 여기가 바로 바넘이 꿈꾸던 무대였다. 쳐다도 볼 수 없었던 상류층들이 담소와 웃음, 허세를 나누는 곳, 바넘은 그제야 장인에게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다. 함께 쇼를 준비한 동료들은 바넘과 함께 목을 축이고 싶었다. 술 몇 잔 한다고 쇼에 지장을 줄 것도 아니었다. 파티장의 문을 열려는 동료들을 바넘이 황급히 가로막는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바넘, 얼버무리며 참여할 필요 없다고 둘러댄다. 난쟁이, 키다리, 털북숭이(케알라 세틀)는 그제야 깨닫는다. 자신들은 철저히 도구였다는 걸.


바넘은 기인들의 스타성을 알아차리며 기용했지만 상류층 앞에서 그들은 눈에 거슬리는 치부에 가까웠다. 자신의 신분 상승에 걸림돌이 될 것 같았고 양해를 구해야 했다. 자신의 입지가 더 중요했다. 성공한 사업가를 넘어 귀족 나으리를 꿈꿨다. 그리고 이런 속내를 들키고 말았다. 동료들은 배신당했다 여겼고 위대한 쇼는 위기의 쇼가 된다. 바넘은 뒤돌아볼 틈이 없었다. 그는 확장을 꿈꿨고 천상의 목소리 제니 린드(레베카 퍼거슨)를 기용해 세계 투어를 나선다. 투어가 흥행을 거두는 동안 또 다른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바넘의 감정은 제니 곁에서 흔들리고 있었고 채러티(미셸 윌리엄스)는 알아차린다. 불길이 치솟는다. 화재로 인해 쇼장은 전소된다.


자수성가 스토리는 흔하지만 늘 매력적인 소재다. 빈자에서 부자로, 약자에서 강자로 성공하는 건 만인의 염원이기에 공감은 마약처럼 눈과 귀를 붙잡는다. 위대한 쇼맨은 바넘의 일대기를 유려하고 드라마틱하게 치장한다. 인상적인 건 영웅 신화로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바넘이 자신을 정상급으로 오르게 해 준 친구들을 파티장에서 부정하는 장면은 마치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 부인하는 에피소드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가 얼마나 상류층과 어울리고 그들처럼 되고 싶은지, 이를 위해 얼마나 많은 것에 눈을 감을 수 있는지 알게 해줬다. 기인 친구들에게 바넘은 분명 인생의 새로운 기회를 제공해준 은인은 분명했지만 '이용'했다는 혐의를 벗을 수 없는 회사 대표이기도 했다. 다양성의 존중이란 이상은 그렇게 꺾였다. 사람들은 다시 쇼를 보러 오겠지만 그들은 존중하기 위해 오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바넘과 맥을 같이 한다. 타오르고 사라질 불꽃같은 유희를 위해서. 영영 잡을 수 없는 상류 계급이라는 허상을 위해서. 관객과 광대, 고용주와 직원 간의 거리는 견고하게 유지된다. 그때 파티장에서 바넘이 애써 닫으려 했던 문은 어린 바넘을 후려쳤던 귀싸대기와도 같았다. 바넘은 그토록 원하던 물질적 성공과 함께 자신을 때렸던 남자와 같은 어른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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