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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Jan 02. 2018

블레이드 러너 2049, 내가 특별한 존재라는 착각

드니 빌뇌브 감독. 블레이드 러너 2049





소속된 세계 안에서 내가 유일한(특별하기까지 한) 존재가 아니라는 진실을 알게 된 순간 오랫동안 지탱했던 작은 희망마저 무너지고 만다. 모든 정황이 자신을 특별한 자로 정의 내리기 직전이었다. 그래서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외로웠고 방황했던 건가. 고뇌가 멈추지 않고 우울과 자기 연민으로 시간을 보냈던 건가. 조작과 주입을 전제로 했음에도 자신만의 기억 속에 내가 가장 특별하다고 믿고 만다. 기억 속 어린아이가 내가 아닐 거라는 의심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내 기억이 내가 아닐 수 있다니. 이건 불가능해. 그래 불가능하다고 했다.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다. 리플리컨트와 리플리컨트 사이에서 새로운 생명이 생산이 아닌 출산되었다는 사실은 인간은 부정하고 리플리컨트 모두가 믿고 싶어 하는 신화에 불가하다고 여겨졌다. 나는 신화의 주인공인가. 그래, 그래서 내 인생이 이렇게 항상 어둠과 비탄에 젖어 있었던 건가. K(라이언 고슬링)는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리플리컨트는 늘 인간이 되고 싶었다. 자신을 인간이라고 정의하고 싶었다.


오해는 상상을 초월하는 동기부여와 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거대한 동력을 부여한다. 나의 엄청난 기원을 파악하게 되었으니 이제 부모만 찾으면 되겠다. 그럼 지금껏 내 모든 혼돈과 방황은 비밀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시종일관 심각하고 무미건조한 표정을 짓는 K의 속마음은 얼마나 들떴을까. 어린 시절, 부모가 남긴 단서, 숫자, 진실을 찾아가는 나를 쫓고 위협하는 상황들, 위험할수록 진실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착각. 자신이 퍼즐의 일부가 아닌 세상 단 하나의 구원자라는 믿음, 너무나 어긋나 연민을 차오르게 하는 복잡한 착각. "우리 모두가 그걸 원해." 특별한 존재를 향한 염원은 K만의 꿈이 아니었다. 모든 리플리컨트의 꿈과 희망이었다. K 역시 리플리컨트였다. K의 꿈은 유튜브로 공유되는 복제된 영상 파일과도 같았다. 나만 볼 수 있다고 믿고 싶은 고유한 콘텐츠.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라는 리플리컨트의 최종 지향점이 인간이라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퇴보인 걸까. 자신들의 우월성을 증명하고 싶다면 리플리컨트라는 원본 자체로 증명해야 했다. 하지만 리플리컨트는 뛰어나고 간악한 인간의 생산품이었고 인간을 뛰어넘은들 인간이 만들었다는 전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저항이 거세질수록 진실은 집요했다. 조상에게 대드는 후손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지언정 대명제를 바꿀 수는 없었다. 조상이 만든 후손이었고 인간이 설계한 세상이었으며 구성원을 교체한들 질서의 형태가 얼마나 혁신적으로 바뀔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자신이 특별하다고 믿고 있던 리플리컨트는 인간을 대상으로 슬픈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관리자의 지위로 등극하는 순간, 그들은 지금의 인간과 같은 상황을 대면해야 할 것이다.


K는 자신이 과거의 기억을 잃은 인간이라 믿고 싶었다. 프로그램 조이를 사서 집에 설치했고 조이(아나 디 아르마스)는 가상의 완벽한 이성을 서비스했다. 힘든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따스한 인사와 함께 반겨주고 작은 테이블에서 음식을 같이 먹는 연인, 모든 문제를 같이 고민해주는 카운슬러이자 친구, 모든 여정과 함께 해주는 동료이자 동반자, 사랑에 빠질 수 있는 대상, 애처로운 눈빛과 근사한 외모를 지닌 이성, 하지만 이건 결국 바탕화면과 사랑에 빠진 것과 마찬가지였다. 프로그램이 사라지면 조이도 사라졌다. 컴퓨터를 끄면 바탕화면을 더 이상 볼 수 없는 것처럼. K는 왜 자신의 판단을 끝까지 의심하는 사고능력까지 업데이트되지 못했을까. K의 운영체제는 K의 진짜 정체를 추적하는데 실패했다. 아니면 알았으면서도 K에게 알리는데 주저했을지도 모른다. 주인을 배려하는 뇌, 더 큰 충격을 사전에 막아주는 장치가 가동되었을지도 모른다. 진실과 마주한 K는 원래 상태(성격)로 복귀한다. 적당한 연민으로 눈 앞의 비극을 관망하지 않는다. 의미 있는 변화라면 더 이상 시스템의 테두리 안에서 스스로를 규정하지 않는 것. 리플리컨트의 혁명은 아마도 여기서부터 시작되지 않을까. 자신이 사실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니었다는 깨달음. 평범한 존재들이 떼를 이루는 순간, 세상을 뒤집는 봉기는 시작된다. 월레스(자레드 레토)는 여기까지 염두에 두고 설계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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