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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Feb 01. 2018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은 이렇게 물에서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앨리사(샐리 호킨스)가 가장 자유로운 장소는 물 속이었다. 출근 전 욕조 안에서의 유희는 반복되는 일상 중 유일하게 자기 욕망에 솔직해질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회사에서 그녀의 주 업무는 바닥을 흥건하게 적신 피를 닦는 일이었다. 피의 출처는 목에 사슬을 매고 있거나 거대한 수조에 갇혀 있었다. 인간의 형태와 닮았지만 인간의 언어를 할 수 없는 존재. 물고기 같이 미끌 거리는 피부와 은밀하게 보이는 아가미, 수중생활에 적합한 체형. 앨리사는 괴물(더그 존스)을 보는 순간 사로잡힌다. 숨 막힐듯한 동질감과 연민이 둘 사이에 넘실거린다. 사랑이었다.


앨리사는 괴물을 구원한다. 괴물을 구원함으로써 자신을 구원하기로 한다. 감정이 소용돌이와 함께 육체적 흥분이 휘몰아친다. 괴물의 신체 구조상 늘 젖어 있어야 생존이 가능했다. 물속에서 둘은 서로의 육체를 감는다. 세상이 그들과 함께 물에 넘친다. 아무도 그들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똥오줌이나 닦는' 노동력과 '소련을 앞지를' 무기로 착취하려고만 하지만 둘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폭력과 차별로 얼룩진 세계 안에서 괴물과 앨리사는 순수하고 고유한 둘 만의 세계를 구축한다. 물. 물 밖은 온통 위험했고 수중 속은 따스하고 환상 그 자체였다. '당신은 모를 거예요.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이 소리의 형태로 전달되지 않는 세계 안에서 둘은 눈빛과 육체로 서로의 진심을 감지한다. 번쩍이는 캐딜락이 없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둘은 물속에서 둘만의 완벽한 사랑의 형태를 완성한다. 괴물과 사랑에 빠진 앨리사는 더 이상 출퇴근 버스 안에서 창에 기대지 않는다.


위기는 절정에 이르렀을 때 찾아오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순간이 위기였다. 물 밖에서는 숨을 쉴 수도 온전히 교감할 수도 없었다. 예정되었던 막다른 곳에 다다르자 둘은 이별하지 못한다. "안돼요, 나 없이 가요." 총알이 육체를 뚫고 들어와도 둘은 이별하지 않는다. 괴물은 앨리사와 함께 영원한 태초의 장소로 숨는다. 돌아간다. 자신을 신으로 만들어준 곳이자 일라이자의 상처가 돋아난 곳으로.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부여받는다. 물 밖의 세상에서 죽은 육신을 버리고 물속에서 다시 태어난다. 행복한 표정으로 눈을 감는다. 입을 맞춘다. 앨리사의 상처에서 숨이 돋아난다. 그렇게 세상은 앨리사를 잃고 괴물과 앨리사는 전부를 얻는다.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물 밖의 세상은 틀과 기준을 만들어 계급을 형성한다. 소리를 낼 줄 아는 다수들은 그렇지 않은 소수를 멸시하고 차별한다. 서로 다른 성별을 탐닉하는 다수는 서로 같은 성별을 탐닉하는 소수를 차별한다. 하얀 피부색을 타고난 다수들은 그렇지 않은 소수를 차별한다. 정상의 몸으로 비정상의 감정을 느끼는 인간은 정체성의 혼란에 빠진다. 정의할 수 없는 상황에 판단의 오류를 일으킨다. 자신을 불안하게 만든 요소를 제거하기로 한다. 스트릭랜드(마이클 섀넌)에게 괴물과 앨리사는 모두 이해불가의 영역이었다. 갖지 못할 바에야 파괴한다가 그의 원칙이었다. 그는 광기로 치닫는 세상의 상징이었고 괴물과 앨리사의 천적이었다. 애초 구분을 지은 것도 그들을 물 밖에서 사냥하려 한 것도 증오를 형성한 것도 스트릭랜드 자신이었다. 자신이 만든 규율 안에서 자신을 처형하지 못해 타인을 처형하려 했다. 스트릭랜드는 끝내 자신과 어느 누구도 설득하지 못하고 자멸한다. 블랙홀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세상의 끝. 괴물과 앨리사는 사라진다.


말 못 하고 숨 못 쉬는 기존의 물 밖 세상 속에서 괴물과 앨리사는 살 수 없었다. 다수가 말 못 하고 숨 못 쉬는 물속에서 비로소 둘은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누구도 저렇게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 누구도 저런 삶을 원하지 않을 테니. 물고기의 비늘 옷과 말을 못 하는 성대를 지닌 채 살아가길 바라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이런 '열악한' 조건 안에서 (말도 안 되고 보이지도 않는) 사랑이라는 화염은 만개한다. 폭발한다. 모든 것을 뒤덮고 아래층까지 척척하게 적신다. '지금 여기서' 벗어나야만 계속 사랑할 수 있었다. 둘은 모든 장벽을 부수고 서로의 공간으로 깊이 들어가 서로를 눈 앞의 자신을 너를 끝내 감미롭게 부둥켜안는다. 다른 조건은 아무것도 필요 없었다. 블랙홀이 우리를 쫓아와 죽이려 한다면 블랙홀을 죽여 없애서라도 이 사랑을 지켜야 했다. '부서진 계획의 잔해에 불과한' 삶 속에서 그들은 서로의 몸과 마음을 빈틈없이 채우는 퍼즐 조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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