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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Mar 05. 2018

레드 스패로, 스파이를 유혹한 스파이

프란시스 로렌스 감독. 레드 스패로




최악은 전제가 아니라 결과다. 지금이 최악이라는 단정은 수정되어야 한다. 적어도 도미니카(제니퍼 로렌스)에겐 그랬다. 아픈 엄마를 돌보고 있지만 다리가 망가져 버린 발레리나. 선택권이 없다. 그렇게 첩보원 육성 기관으로 옮겨진다. 도미니카의 어여쁜 외모에서 반야(마티아스 쇼에나에츠)는 가능성을 본다. 요주의 인물을 제거하기 위한 미끼. 도미니카는 미끼로 길러진다. 아니 발견된다. 아니 깨닫는다. 자신이 이러한 역할을 하는데 최적의 자질을 지녔음을.


러시아라는 조국, 미국이라는 적국. 사이에서 도미니카의 쓸모는 무한했다. 눈빛과 손끝, 속삭임과 숨소리로 상대를 파멸로 끌어내릴 수 있었다. 백업 플랜은 늘 준비되어 있었다. 누구에 의해서가 다를 뿐 도미니카의 타깃은 제거되었다. 다음 차례가 CIA 요원이 되었을 때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나다니엘(조엘 에저튼)은 도발적인 수영복을 걸치고 곁을 스치는 도미니카를 보고 정체를 간파한다. 스파이 대 스파이, 둘은 모든 패를 다 보여준 듯했지만 몸도 맘도 뜻대로 섞이지 않았다. 본능과 이성이 뒤섞였고 신뢰의 좌표는 늘 달라졌다. 도미니카가 이중스파이가 되기로 했을 때조차 마찬가지였다. 도미니카를 레드 스패로로 만든 자들은 의심이 많았고 심증만으로도 껍질을 벗기는데 능숙했다. 도미니카는 유능했지만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엄마 병원비 때문에 스파이가 되어야 했던 약점 많은 참새(sparrow)였을 뿐이었다.


궁지에 몰린 도미니카는 살지도 죽지도 못한 고문에 시달린다. 비명과 피멍, 고통과 공포가 도미니카의 영혼까지 도려낸다. 죽음 자체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압살 당할 듯했던 도미니카는 나다니엘에 대한 입장을 재정립한다. 입을 틀어막은 채 껍질을 벗긴다. 비명은 틀어막혀 공기 중으로 흩어지지 못한다. 살점이 너덜거린다. 이중스파이 도미니카는 언젠가 배신자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선택되었고 선택한 운명.


유혹, 조종, 살인이 특기여야만 하는 직업이었다. 죽지 않으려면 죽여야 했고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명령과 강압, 긴장과 생존본능 사이에서 도미니카는 자신을 신뢰해야 했던 모두를 속인다. 기만의 게임 속에서 최후의 승리자가 된다. 위험은 계속 커졌고 감당할수록 위치는 달라졌다. 자신을 얼마나 속여야 했을까. 하지만 도미니카는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목적을 위해 현재의 동선을 얼마든지 휘저을 수 있었고 피범벅을 뒤집어쓰면서도 끝내 적의 숨통을 끊어 놓을 수 있었다. 모든 영예는 살아남은 자에게 부여되었다. 갈채 속에서 우뚝 선 순간, 그곳에 더 이상 참새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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