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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Mar 19. 2018

걸어도 걸어도, 평생에 걸친 복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걸어도 걸어도




남은 자들이 모여 떠난 자를 이야기한다. 산 자들의 주제들이란 과거뿐이다. 미래는 각각 다르고 공유하기엔 너무 복잡하다. 안전한 주제는 모두가 기억하고 함께 경험했던 것들. 큰 아들. 아버지가 원하는 삶을 살고 사랑을 독차지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지상에서 사라진 존재. 물가에서 사람을 구하고 자신은 나오지 못했다. 1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는, 아니 벗어날 수 없는 상실의 충격과 슬픔, 고통의 매일매일. 큰 아들의 기일에 손님이 찾아온다. 어색한 웃음과 난처한 목소리, 미리 준비한 듯 하지만 체화시키지 못한 말들, 그는 대신 살아남은 자다. 큰 아들이 구한 사내.


사내가 인사하며 떠난 후 둘째 아들 료타(아베 히로시)는 엄마 토시코(키키 키린)를 채근한다. 매년 뭐하러 그렇게 부르냐고. 그가 직접 죽인 것도 아니고 이제 그만 인사하러 올 때도 되지 않았냐고. 나긋하고 상냥한 목소리와 눈빛의 토시코의 표정이 서늘해진다. 어둠이 깔리고 안광이 번뜩인다. 한때 전부였던 아들을 잃은 여자. 모를 리 없다. 매년이 아니라 매일 사죄한다 하여도 아들이 돌아올 일은 없다는 걸. 여자는 덧붙인다. 평생 고통받는 우리에 비해 그는 겨우 일 년에 하루 힘들 뿐이라고. 그 정도는 괜찮다고. 괜찮아야 한다고. 못마땅하기 그지없다. 아들이 목숨까지 버려가며 구한 자가 시시한 외모에 시시한 직업에 시시한 현재를 가진 이토록 시시한 자라니. 어디 하나 모자람 없던 우리 아들 대신 살아남은 자가 겨우 저런 초라한 자였다니. 방금 전 그를 배웅하는 자리에서도 깍듯한 예와 따스한 미소를 잃지 않던 토시코였다. 영영 치유되지 않을 상실. 토시코에게 그가 느낄 번거로움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한 사람의 죽음과 한 사람의 삶이 뒤바뀌는 사건. 일상적일 만큼 흔한 뉴스. 관점에 따라 이해와 해석은 너무 달라진다. 겨우 목숨을 구했을 사람과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을 사람. 등가교환은 영영 불가능하다. 인구 중 한 명이 사라진 게 아닌 가족 전체가 영원히 고통받을 상처를 입는 것. 복수는 남은 사람들의 존립을 위해서라도 불가피하다. 항상 웃는 자는 의심해야 한다. 항상 웃어야 할 만큼 무겁고 어두운 사연을 감추고 있을 테니까. 형을 잃은 둘째 료타는 당신의 어머니가 왜 저러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아들을 잃은 어미의 심정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다. 공감과 위로의 대상조차 될 수 없다. 시간의 힘으로 해결되는 비극도 정의할 수 있는 충격도 아니다. 이게 가능했다면 망각하고 떠나보내기 더 수월했을 것이다. 아무도 그러지 못한다. 애초 생성의 기미조차 없었어야 할 슬픔.


아들이 구한 자를 죽일 수 없기에 대신 평생에 걸쳐 귀찮게 하겠다는 토시코의 말을 농담처럼 넘길 수 없었다. 농담이 아니었으니까. 10년에 걸쳐 실행해 왔고 숨이 붙어 있는 한 계속 이어질 것 같았다. 죽은 아들의 마지막을 본 자에 대한 확인, 죽은 아들 대신 살아남은 자의 삶을 향한 경고, 죽은 아들이 다시 돌아온 것 같은 반가움, 죽은 아들이 저자를 구하고 떠났구나 라는 슬픔이 모두 녹아 있었다. 추모이자 복수였고 그리움이자 증오였다. 초대받은 자는 토시코의 저의를 언제쯤 알아차릴 수 있을까. 그때가 오기나 할까. 아마 그날이 온다면 토시코는 그를 더 이상 부르지 않을 것이다. 아들이 떠난 이유를 명분을 메시지를 그제야 전달받은 것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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