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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Mar 22. 2018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너무 한낮의 연애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모든 날이 괜찮았다. 특별히 나쁘지도 어렵지도 괴롭지도 않은 시간들. 이탈리아 남부. 모든 장소가 인스타그램 같은 동네. 햇볕이 침대 위에 포개질 때쯤 늦은 잠에서 깨어 아침을 먹고 자전거를 타고 수영을 하러 숲으로 간다. 뭔가 떠오를 때면 가방을 뒤적여 악보를 다듬고 집으로 돌아오면 거실의 피아노 앞에 앉아 어깨와 턱을 들썩거리며 심취한다. 헐벗은 차림으로 어디든 활보할  있고 옆에는 친구들과 나를 좋아해 주는 소녀가 가까이 있다. 소년의 이름, 엘리오(티모시 살라메). 교수 아버지 펄먼(마이클 스털버그) 유산을 물려받은 어머니 아넬라(아미라 커서) 곁에서 천사처럼 삶과 시간 사이에 노닐고 있었다. 어떤 긴장감도 침투할 틈이 없었다. 올리버(아미 해머) 들어오기 전까지.


크고 아름다웠다. 지성도 육체도 움직이는 모든 순간이 쏟아지는 모든 말들이 엘리오를 혼란에 빠뜨렸다. 빈정거림으로 시작해 집착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가 없는 침대에서 그의 팬티를 뒤집어쓰고 숨을 들이쉬고 그를 떠올리며 과즙으로 흠뻑 젖은 과일에 성기를 비비기도 했다. 나이 차이, 키 차이, 차이가 다 무슨 소용이람. 경계와 장애, 어떤 것도 감지할 틈이 없었다. 직선이었다. 그의 외모와 눈빛은 고운 곡선이었고 그에게 향하는 길은 오직 직선뿐이었다. 모두가 알아채도 상관없었다. 올리버는 엘리오에게 더 이상 숨길수 없는 존재였다. 숲을 모조리 불살라버릴 듯한 환상적인 태양 아래서 둘은 부둥켜안고 키스하고 자전거를 타고 수영을 한다. 처음 겪는 계절이었다. 다시 오지 않을 사랑이었다.


두 명의 다비드가 세상의 모든 감정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낮도 밤도 해도 달도 그들 것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서로의 목을 졸라 떼어놓을 때까지 올리버와 엘리오는 엘리오와 올리버의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고 있었다. 세상의 어떤 관습도 둘을 방해하지 못했다. 영혼과 정신을 송두리째 바뀌 놓았다. 시간에 기습당하기 전까지. 둘은 완전한 관계로 존재해도 된다고 특권을 부여받은 사람들 같았다. 아니 정체성을 잠시 망각한 천사 같기도 했다. 시간의 검이 둘의 살덩이를 해체하기 직전 대천사와도 같았던 아넬라는 산소호흡기를 허락한다. 마지막 여행. 둘은 산을 오르며 비명을 지르고 끝나지 않을 듯한 희열에 전율한다.


정해진 시간에 도착한 기차가 떠난다. 제자리. 그리고 다시 여름, 다시 돌아온 집, 바뀐 헤어스타일. 전화벨이 울린다. 잊을 수 없는 그의 음성. 모든 감각이 송두리째 소환된다. 통화가 끝나고 엘리오는 익사할 듯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다. 거짓말을 들었다면 한동안 안도하며 기뻐했을지도 모른다. 올리버는 이미 정해진 것들을 이야기한다. 둘이 만나기 직전에 아마도 예정되었던 것들. 벼락같은 첫사랑이 끝나도 돌아간 곳에서 다시 시작된 계획. 엘리오에게 알리지 않았고 더 이상 엘리오가 범접할 수 없는 언약. 둘은 한때 광기에 휩싸였고 구체적인 영원을 약속할 만큼 이성적이지 못했다. 그럴 수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았기에 그만큼 더 뜨거웠다. 너무 뜨거워서 자꾸 물속에 빠져야 했다. 올리버는 올리버의 길을 가기로 선언했고 엘리오는 여전히 그해 여름에 멈춰 있었다. 엘리오의 감정은 그해 여름에 장렬히 익사한 채 떠오르지 못하고 있었다. 스스로 건지기 전까지 아무도 수습하지 못할 것이다. 또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으로 올리버를 부를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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