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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Apr 11. 2018

레이디 버드, 날고 싶은 아기새, 걱정하는 엄마새

그레타 거윅 감독. 레이디 버드





가난은 사람을 구차하게 만든다. 부자였다면 가만히만 있어도 주변에서 알아서 모여들었을 텐데 없이 살아서 내가 그쪽으로 가야 한다. 부모가 가난하면 자식도 피곤하다. 애지중지 키운 거 다 아는데도 여전히 내가 원하는 건 점점 많아지고 엄빠가 해줄 수 있는 건 턱없이 줄어든다. 입에 풀칠하고 구멍 난 옷 입지 않는 걸로 만족하려고 태어난 인생이 아니다. 뉴욕 상류층으로 태어났으면 얼마나 끝내줬을까. 부모가 준 것들 중 맘에 드는 게 별로 없어 이름까지 바꾸려 한다. 이건 크리스틴(시얼샤 로넌), 아니 레이디 버드로 홀로 개명한 소녀의 이야기다.

쟤(오데야 러쉬)는 같은 고등학생 주제에 레인지로버를 몰고 등교해도 되는 건가. 레이디 버드는 회사에서 잘린 아빠(트레이시 레츠)가 부끄러워 걷는 게 좋다고 거짓말을 한 후 교문에서 먼 곳에서 내린다. 이곳 새크라멘토는 지긋지긋하다. 대저택에서 부유한 삶을 누릴 수 있다면 (거기 사는) 일가족을 몽땅 죽여버리겠다는 농담도 던질 정도다. 숨 막혀 죽을 정도로 일일이 간섭하는 엄마(로리 멧칼프)와 다정하지만 무력한 아빠, 그리고 어디서 데려왔는데 인종이 다른 형제자매들. 단짝 줄리(비니 펠드스타인)와 수다 떠는 소소한 즐거움이 있지만 그뿐이다. 변화가 절실하고 여길 뜨고 싶어 미치겠다. 첫눈에 반한 잘생긴 녀석(루카스 헤지)은 나와 키스한 것처럼 동성과도 키스하고 있었고(그가 찾아와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지 말아달라며 오열하는 장면이 가장 슬펐다) 담배와 책 밖에 모르던 사회 비관주의 소년(티모시 샬라메)은 태연한 표정으로 첫 경험을 와장창 망쳐버렸다. 으, 대학만이 살길이다.

모두 거기서 거기인 줄 알았다. 비슷하게 행복하고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슬픈 줄 알았다. 학교 신부님(스티븐 헨더슨)의 십 대 아들이 마약 중독으로 죽었다거나 세상 걱정 없이 사는 것처럼 보이던 녀석의 아빠가 시한부 암환자라는 건 일일이 묻거나 찾지 않는 한 알 수 없는 일이다. 엄마는 내가 자라는 내내 평생 돈걱정을 하며 정신병원에 출퇴근하고 아빠는 더 이상 어떤 회사에서도 받아주지 않는다. 밥맛인 수학선생에게 예쁨 받는 베프도 짜증 나고 뭐 하나 제대로 풀리지 않는 내 인생도 막막하긴 마찬가지다. 삶은 구석구석까지 공유될 수 없다. 개인의 삶은 타인에게 말할 수 없는 부분들로 온통 채워져 있다. 먼지 같은 비극들을 구구절절 토로해봤자 나만 더 초라해질 뿐이다.

마침내 상경한 뉴욕은 얼마나 다른가. 주변엔 새크라멘토에서 왔다고 소개하면 못 알아 처먹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왔다고 고쳐 말하면 아~ 거기 이러며 입술을 들이대는 천치뿐이다. 불행은 얼마나 상대적일까. 숙취에 뻗어 응급실에 실려가고 거기서 만난 눈을 다친 동양인 꼬마를 봐야 내가 지금 얼마나 평범한 행복을 누리는지 확신할 수 있는 걸까. 뉴욕으로의 진학을 엄마에게 숨겨왔다. 학비가 비싸고 집에서 멀어 절대 허락하지 않을 테니. 엄마의 엄마에 대해 물어봤을 때 폭력적인 알코올 중독자였다는 대답을 들었다. 엄마는 그보다 더 나은 엄마가 되기 위해 평생을 자신의 과거와 싸워온 건 아닐까. 자신과 다른 부모와 성장기를 선물하기 위해 자신이 엄마에게 바랐던 관심과 사랑을 딸에게 쏟아부었던 건 아닐까. 자기 자신이면서도 절대 자신과 다른 삶을 살기 원하는 나 레이디 버드에게?

엄마는 자신의 한계를 알았음에도, 자신만이 딸의 전부와 이상이 되어줄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에게 수없이 세뇌했을 것이다. 수많은 배신과 거짓을 당하면서도 다시 돌아와 줄 당신의 어린 존재로서의 딸로 (스스로에게) 각인시켰을 것이다. 물론 세상의 어떤 자식에게도 이러한 강박이 자연스럽거나 당연 할리 없다.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부터 부모에게서 비롯된 지독히도 끈끈한 것들로부터의 탈피욕망을 담고 있다. 엄마는 바뀌지 않을 테고 크리스틴 또한 영영 완전한 레이디 버드로 살아갈 수 없다. 좌충우돌 성장기 딸과 돈 걱정 딸 걱정에 매여 사는 엄마, 둘은 나이 들수록 서로를 인정하고 이해하며 먼 곳에서도 깊이 품는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의 결말에 익숙하면서도 듣고 목격하며 눈물 흘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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