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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May 08. 2018

120BPM, 에이즈 양성으로 죽어가는 사람들

로빈 캉필로 감독. 120BPM








격렬한 사랑에 빠질 때의 맥박수, 120BPM(battements par minute).  '사랑의 속도'라고 쓰면 낭만적이다. 거기에 죽어가는 과정이 겹치면 치명적이기까지 하다. 행사장의 연설 도중이나 교실에 난입해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진압당하며 피를 흘리고 준비한 가짜 피 봉투가 터져 온 공간을 물들이고 피칠갑이 되면 처참하게 까지 느껴진다. 목이 터져라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그들에겐 시간이 없다. 몸이 죽어가고 있다. 세포가 줄어들고 있다. 게이 프라이드로 단단히 무장한 청춘들의 과격한 운동 과정을 담은 이야기가 맞기도 하지만 좀 더 축소하면 실제적 죽음의 두려움과 공포에 몸서리쳐가며 바둥거리는 인간들의 마지막 순간들이기도 하다. 후자가 더 가깝게 느껴졌다.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는 폭발적인 환희의 기쁨만큼 소멸하는 빛과 색 또한 절절했다. 더 폐부를 쑤시고 들어왔다. 모든 사람은 생물학적으로 죽어가고 있지만, 이건 다른 이유로 죽어가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다. 에이즈 양성 판정을 받은 자들의 어쩌면 인생 마지막 싸움에 대한 이야기. 애석하게도 낭만적 접근은 현실인식을 방해한다. '사랑의 속도'는 이 리뷰의 제목이 될 수 없었다.  


무지는 두려움을 확산한다. 정부와 제약회사를 상대로 에이즈 확산 반대 운동을 하는 단체는 이를 경계한다. 액트업 파리(ACT UP PARIS)는  그중 하나다. 정기적으로 모여 의제를 공유하고 현재 상황과 뉴스, 피드백,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의논한다. 무척 혼돈스러워 보이고 각각의 동기와 목적으로 모인 것처럼 보여도 추진력은 과감하다. 언쟁에서 물러섬 없고 이는 단체의 뿌리와 단결력을 더욱 견고히 만든다. 제약회사를 압박해 에이즈 개선 약에 대한 출시를 촉진하고 정부가 이를 강력하게 협력할 수 있도록 맞선다. 말과 글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직접 부딪치고 쓰러지고 체포된다. 공권력과 맞서고 질서를 헝클어 뜨리며 이를 통해 주목받고 더 알려져서 에이즈에 대한 경각심을 키우고 예방할 수 있도록 강력하게 나간다.  


모든 시작점과 동력, 목적에 에이즈가 있다. 에이즈는 판타지가 아니다. 에이즈는 실제 죽음과 직결된다. 액트업 구성원들이 격렬하고 열정적인 것은 이들이 피 끓는 청춘이어서가 아니다. 이들은 물러설 곳이 없다. 죽음 뒤에는 길이 없다. 이들의 사자후는 생애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유일한 저항이다. 나도 살고 싶고 또 누군가가 동질의 고통과 두려움을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한 절박함이자 몸부림이다. 시종일관 심각하지도 않다. 에이즈 양성인은 괴물이 아니다. 똑같이 먹고 자고 공부하고 고민하고 춤을 추고 사랑을 고백한다. 같이 죽어가는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일, 그리고 언젠가는 누군가는 여기 모인 모두가 알고 있는 이유로 먼저 숨을 거둘 수 있는 일. 에이즈 양성이 아닌 이들보다 이른 죽음을 전제로 시작되는 관계, 입맞춤, 깊은 밤의 육체와 육체. 찻잔 속의 태풍이라기엔 소용돌이가 거세다. 저항운동도 압박도 사랑도, 그리고 갑작스럽게 죽음을 향해 돌진하는 속도 또한 그렇다.


단체의 저항운동 속에는 모든 희로애락이 녹아 있다. 대화와 충돌, 유머와 실패, 반목, 갈등, 배반의 감정과 구애의 신호들, 사그라드는 개인의 불꽃, 메말라가는 육신, 총기를 잃은 눈빛, 부축받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는 시간과의 직면. 연인과 함께 떠난 해변, 헐벗고 모래 위에 섰을 때, 앙상한 몸은 금방이라도 휩쓸려 부서질 것 같았고, 몰려오는 파도는 키보다 낮았음에도 쓰나미 같았다. 파도가 몸을 덮쳐 지나가면 모든 게 끝날 것만 같았다. 생, 호흡, 사랑, 그동안의 말과 글들, 추억들, 악몽들, 어린 시절, 지금의 연인 모든 게. 날이 오고 있었고 마지막 결정을 내린다. 오열하는 연인, 부르짖는 소리, 하나 둘 모여든 동료들. 아무도 죽음을 기다리지 않았지만 모두에게 닥쳤다. 매일 웃고 떠들고 담배 피우고 춤을 추던 그가 나뭇가지처럼 누워 눈감고 있었다. 예상했지만 준비할 수 없었던 충격. 슬픔은 느닷없는 새벽에 울음소리로 퍼진다. 언젠가 모두가 죽지만 너무 빨리 갑자기 에이즈 양성으로 죽었다. 다른 병에 걸릴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같이 뭉쳐 싸운 친구의 죽음은 질감이 다르다. 대응 방법도 다르다. 친구의 죽음은 끝이 아니다.


유족의 동의를 얻고 유골을 거둔다. 유언의 실현, 흰 가루가 된 동료는 다시 액트업에 참여한다. 주장을 펼치기 위해, 계속 살아남기 위해 타깃이 된 만찬장에 흰 가루가 흩뿌려진다. 그들이 집어 먹던 쿠키 위로 와인 위로 치즈 위로 유골이 흩날린다. 부와 여유가 휘감던 공간은 절규와 메시지로 가득 찬 혼돈의 도가니가 된다. 에이즈로 죽은 친구와 에이즈로 죽어가는 이들이 뭉쳐 에이즈 치료와 확산을 막기 위해 외치고 있었다. 심장이 터져 죽거나 에이즈로 죽기 전까지 멈추지 않을 것 같은 에너지. 살아남은 어떤 자보다 강한 모습으로 현재를 때리고 있었다. 에이즈에 대한 이런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다. 죽어가는 자들이 죽어갈지도 모르는 자들의 위기를 막고 이미 (산채로 또는 실제로) 죽은 자들을 대신해 에이즈를 알리고 있었다. 처음 겪는 속도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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