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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May 23. 2018

콰이어트 플레이스, 침묵의 미래

존 크래신스키 감독. 콰이어트 플레이스

현재와 멀지 않은 미래의 어느 시점,  가족이 숨죽여 걷고 있다.  아이와 부부, 인류는 다섯  밖에 남지 않은 건가. 궁금하다고 소리 내어 물어보면  된다. 표정과 수화로 전달해야 한다. 만약 소리를 낸다면, , 순식간에 죽는다.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의 역작 미스트에 나오는 괴물의 친구 같은 괴물들이 거대한 갈고리로 채간다.  혀로 파리를 낚아채는 개구리처럼, 시속 120km/s 달려와 가젤의 목덜미를 덮치는 치타처럼. 인간은 그저 당하고 먹히는 먹이사슬 최하위 개체가 된다. 막내 아이(캐드 우드워드) 우주선으로   막히는 침묵의 행성을 탈출하고 싶었고, 우주선 장난감으로 잠시 꿈에 젖어 있다가 사라진다. 아빠( 크래신스키) 필사적으로 뛰어가지만 막지 못한다. 인간은 의지만으로 괴물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더구나 괴물은  마리가 아니다. 가족은 넷이 남는다.  명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평생 시달릴 .


1년이 지난 후, 가족은 정착해 있다. 누군가의 집, 농장, 지하실에서 먹고 자고 숨으며 일상을 보낸다. 여자(에밀리 블런트)의 배가 볼록하다. 임신, 막내를 잃은 좌절과 우울을 이기려는 시도였는지, 부부는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데 성공한 듯 보인다. 여전히 모든 곳에 떠다니는 공포와 긴장감, 괴물들은 떠나지 않았다. 소리가 들리면 언젠가 그들은 집을 부수고 지하로 침투해 모든 것을 괴멸시킬 것이다. 알기에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언제까지 숨을 수 있을까.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어른 세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이 세대에게 생존하는 법을 가르치는 일, 남자는 둘째 남자아이(노아 주프)를 데리고 고기 낚는 법을 가르치러 물가로 데려간다. 첫째 여자아이(밀리센트 시몬스)는 두고 간다. 애걸해도 데려가지 않는다. 막내를 지키지 못했던 죄책감에 사로잡힌 첫째, 그때 막내에게 우주선 장난감을 손에 쥐어준 건 첫째였다. 첫째는 원죄를 안고 있었다.


모두가 집을 비운 사이, 여자의 진통이 시작된다. 미리 준비한 장소로 이동하던 여자는 계단을 내려가다 길고 날카롭게 솟은 못을 밟는다. 발을 관통할 정도로 길고 날카롭게 솟은 못. 외마디 비명이 입술을 뚫고 나오고 다급히 틀어막지만 이미 늦었다. 괴물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에이리언 같은 거죽 밑으로 숨겨진 거대하고 정밀한 구조의 고막이 펼쳐진다. 상황의 심각성을 눈치챈 아버지와 아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기지를 발휘하지만 낙관할 수 없었다. 더 큰 소리를 내어 괴물들을 자극할 수 있었지만 시간이 없었다. 집은 멀었고 죽음은 가까웠다. 가족을 더 잃을 수 없었다.


남자는, 아버지는, 남편은, 남은 모두를 위해 자신을 잃기로 한다. 목청껏 소리 내어 자신을 가장 급히 해치워야 할 먹잇감으로 표출한다. 엄마가 된 여자의 상황도 다급하긴 마찬가지였다. 겨우 눕힌 신생아의 침대로 괴물이 다가오고 있었다. 두 아이 역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괴물의 약점은 알아냈지만 극심한 고통을 수반했다. 침묵의 미래에 평화는 없었다. 모든 구성원들이 자살과 타살 사이에서 싸우고 있었다. 괴물들이 왜 미국 아니 인류를 공격했는지, 미국의 군부대는 뭘 했는지, 모든 방어체계가 이렇게 쉽게 허물어졌는지 길게 말해주지 않은 어떤 설명도 중요하지 않았다. 한번 막내를 잃은 가족들은 두 번 잃을 수 없다는 각오로 결사항쟁을 벌인다. 지킬 수 있었을까. 괴물 하나의 머리통을 깬다고 우쭐댈 시간이 없었다. 총소리를 들은 남은 괴물들이 모조리 몰려오고 있었다.


'콰이어트 플레이스'를 거대한 하나의 상징으로 보면 흥미롭다. 입을 연 자는 무조선 없애는 새로운 시스템의 등장,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룰을 만들지만 원시적이다. 집단 내부는 침묵이 늘 강요되고 위험요소는 입을 틀어막히며 제어된다. 판타지를 꿈꾸며 소리 낸 자는 일찌감치 사라지고 남은 세대들은 꿋꿋이 싸우지만 상대가 되지 않는다. 적응은 늘 한계에 이르고 위기는 매번 남은 생명력을 갉아먹는다. 노년에 이른 기성 보수 세력은 방해만 된다. 그들은 자살도 제대로 하지 못하며 남은 세대를 죽음의 위기에 빠뜨린다. 희망 같은 거에 의존하거나 논할 시간 따위는 없다. 소리 내고 처참하게 찢겨 죽던지, 모든 소리를 틀어막고 이어폰으로 음악을 감상하며 위태롭게 생을 이어가던지 둘 중 하나다. 미국과 중국은 그렇게 (억압 아래) 살고 있는 걸까. 소수자를 배려하기 위해 보청기를 고쳐주는 노력만이 모두가 살길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감각의 장애는 방해가 아니라(없다고 여겼던) 유일한 희망일지도 모른다. 눈 뜨기 전 꾸는 새벽의 짧은 악몽 같았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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