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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May 28. 2018

당신의 부탁, 태어나지 말 걸 그랬어

이동은 감독. 당신의 부탁

32 효진(임수정)

남편이 죽었다. 남편은 유부남이었다. 아들이 있었고 장례를 치른 후 다시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남편의 아들이었지 내 아들은 아니었다. 가까워질 계기도 없었고. 어느 날 남편의 친척이 찾아와 맡아달란다. 이미 중3이 된 소년. 갈팡질팡하다 알겠다고 했다. 아이의 상황은 생각보다 더 안 좋았다. 32세 여자에게 16세 남자는 얼마나 버거운 존재일까. 법적으로는 어찌어찌 유사 가족 관계로 보이겠지만, 소년은 효진을 아줌마라 불렀고, 효진은 소년에게 야, 대답 좀 해 라고 채근했다. 시간이 해결해주는 게 얼마나 있을까. 적어도 둘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죽은 남편의 아들이든, 매번 거슬리게 아줌마라고 부르는 애새끼든 건사하려면 돈이 간절했다. 허덕이던 학원 운영을 때려치우고 차도 팔고 커피까지 끊어야 했다. 막연한 책임감, 소년의 세부 곳곳에 사랑했던 남자의 태도가 배어 있었다. 그게 그렇게도 그리웠나 보다.


16살 종욱(윤찬영)

아빠가 죽었다. 할머니가 맡았다. 할머니가 치매에 걸렸고 요양원으로 들어갔다. 아직 중3, 보호자 없이 먹고 살기는커녕 학교 다니기도 힘든 나이. 아빠 애인의 집으로 들어가야 했다. 외부인을 향한 시선, 경계, 말투. 앞가림하기 힘든 건 16세나 32세나 마찬가지다. 효진은 두 번째 엄마가 아니다. 언제까지 이 아줌마 집에 있을 수 없다. 버거워하는 거 같기도 하고. 친엄마의 행방을 찾기로 한다. 주소는 있지만 사람이 없다. 아줌마가 찾아주었고 차로 멀리 데려다주었다. 친엄마, 현재 (신내림 받고) 무녀가 된 사람. 효진은 숨기고 있었다. 무녀가 종욱의 친엄마가 아니라는 걸. 종욱은 알고 있었다. 낳아준 엄마는 따로 있다는 걸. 다만 궁금했다. 어린 자신을 버린 이유를. 어른들은 다 말하지 않으니까. 비겁함에 능숙하니까.


'당신의 부탁'은 효진에서 시작해 종욱으로 감정의 무게감을 옮겨간다. 낳아주고 죽은 엄마, 버리고 도망간 엄마, 아빠의 애인인데 엄마 행세하려는 아줌마, 세 엄마 사이에서 종욱의 사춘기는 말 그대로 갈가리 찢긴다. 운이 좋은 누군가는 겪지 않았을 일. 종욱은 어미가 죽었고 유기되었으며 자신을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다시 던져졌다. 이런 경험은 평생 트라우마를 남긴다. 단순 거주 공간의 이동이 아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타자화시키는 과정, 한 부모 밑에서 자라도 온갖 정신적 풍랑을 겪을 수 있는 시기에 종욱은 타인과 타인 사이에서 더욱 낯선 타인이 되고 자신이 대체 누구의 누구이며 또 언제 버림받을 것인지 끊임없는 불안에 시달려야 했다. 돈도 힘도 아무것도 없는 16세에게 정착할 시간이 없었고, 정서적 근원이 되어준 할머니는 요양원에 들어갔다. 종욱은 어디로 가야 할까. 최종 보호자가 된 효진은 해줄 수 있는 게 많지 않아 보인다.


핏줄의 재정의. 정자와 난자의 생산자들이 모두 사라진 세상에서 소년의 남은 가족은 효진뿐이었다. 절친 주미(서신애)가 있었지만 떠돌던 그 소녀 역시 따르던 오빠와 잔 후 기다리지 않았던 임신에 덜컥 다다른다. 임신한 16세 소녀에게 16세 소년이 할 수 있는 말은 농담뿐이다. 아기를 같이 키우자라고 내질러봤자 소용없다. 소녀의 아기는 이미 안정적 조건을 지닌 어른들에게 친자녀처럼 맡겨지기로 예정되었다. 나같이 친부모 없이 자라게 하긴 싫어 라고 저항해봤자, 친부모가 뭐 어떤 것도 해줄 수 없는 상황에서 선택권이 없다. 순혈주의란 얼마나 웃긴가. 조건을 갖추고 자식을 원하는 어른과 조건이 없어 자식을 키울 수 없는 공급자가 만나 새로운 가족의 생성을 협의한다. 시스템. 가족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판타지일 뿐이다. 꿈꾸지만 누릴 수 없고, 누린다고 여겨지는 이들에게는 떼어낼 수 없는 악몽 같은 소집단.  하지만 인간은 갖지 못하는 대상에 더욱 매달리기 마련이라서, 종욱은 앞으로도 보통의 가족을 꿈꾸며 근근이 삶을 이어갈 것이다. 효진은 어떻게 될까. 엄마가 되겠지. 이곳에 없는 사랑하던 남자와 닮은 소년에게 진짜 아들 같은 목소리로 엄마로 불리길 염원하는 여자. 가족이 별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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