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승권 Jul 02. 2018

독전, 나를 모르는 나

이해영 감독. 독전






'나'는 내가 누군지 모른다. 살기 위해 컨테이너 박스에 몸을 실었다. 내 의지보다는 부모라는 인간들의 의지였을 것이다. 컴컴한 박스 안에서 바다를 건너는 동안 부모들은 환상에 젖었다. 같이 실려 있던 건 마약이었다. 쥐떼처럼 맛을 봤고 죽을 때까지 취해 있었다. 산 자의 몰골이 아닌 채로 죽었다. 컨테이너 박스가 열렸을 때 세상에 남은 건 나 혼자였다. 나의 이름도 모르는 나, 나는 아직까지 내가 누군지 모른다.


나도 모르는 내게 밥을 먹이고 이름을 붙여준 이들이 있었다. 옷을 입히고 홀로 설 때까지 키워주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일찍 죽었을 것이다. 아니 이미 죽었고 그들을 통해 새 삶을 부여받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새 삶을 산다 하여 지난 삶이 지워지거나 무효가 되는 건 아니다. 소년이 청년으로, 아이가 악마가 될 때까지 많은 일들이 있었다. 폭발 사고가 있었고 나와 함께 자란 개와 나를 보살펴줬던 이가 죽었다. 나도 죽을 뻔했다.


분노의 끓는점은 낮았다. 인간 청소 경험이 처음은 아니었으니까. 달랐다면 이번엔 가해자가 내가 아니라는 점. 더 이상 잃을 게 있을까 싶었던 내게도 더 잃을 게 있었다는 걸 알았다. 개와 사람, 친구와 부모, 이렇게 다시 혼자가 되었다. 처음 혼자가 되었을 때 나는 아무 힘이 없었는데 다시 혼자가 된 지금은 다르다. 나는 나를 지우려 했던 모두를 지울 수 있다. 나를 죽이려 하는 모두를 죽일 수 있다. 산 자의 몰골이 아닌 채로 죽은 부모의 얼굴로 죽일 것이다. 나는 그때부터 산 자가 아니었고 행여 죽더라도 미련과 의미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나는 내가 누군지 모른다. 아마 나를 진심과 전력을 쫓아온 자보다 나를 더 모를지도 모른다.


나는 복수가 필요했다. 무엇보다 궁금했다. 이렇게까지 나를 흉내 내려하는 자가 누군지. 내가 조직을 꾸리고 마약을 팔아 사업을 키우는 일로 다져온 입지에 뭐가 그렇게 관심이 많은지. 과정은 흥미로웠다. 나를 쫓는 자와 함께 나를 흉내 내는 자들에게 접근했다. 허세와 살기로 가득했지만 결국 어떤 목적을 이루거나 대단한 누군가가 되려는 광기로 가득한 한없이 '인간적인' 자들로 즐비한 풍경. 반드시 죽여야 할 자들과 놔둬도 상관없는 자들을 구분하는 일은 쉬웠다. 차이가 너무 뚜렷했거든. 나는 중간에 끼인 약자로 모든 광경을 관찰했다. 그리고 끝내 복수를 실행했다. 내 형제의 팔을 자른 놈의 팔을 뜯어내고 내 부모를 죽이고 내 형제의 몸을 불태우고 죽지도 못하게 만든 자의 전신을 불태우며. 나는 내가 누구도 아니어도 되는 곳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내가 누군지 묻지 않는 사람들과 내가 누구든 상관없는 눈부시도록 하얀 황무지로.


여기까지 나를 쫓아오는 자라면 그 역시 자신이 누군지 모르는 자일 것이다. 자신의 전부를 누군가를 쫓는 존재로 대체한 자일 것이다. 상식적인 자라면 자신을 상징하는 모든 지위를 내려놓고 자신과 목숨을 걸고 일했던 모두에게 등 돌린 채 이 먼 곳까지 따라올 리 없다. 나를 죽인다면 그의 인생 역시 사라진다. 나를 모르는 나를 세상에서 지운 들 그에겐 무엇이 남을까. 그는 결국 스스로에게 총을 겨누기 위해 나에게 복수한다는 명분을 앞세우는 것 아닌가. 한 발의 총성이 울리고 누군가는 영영 사라졌다. 내가 모르는 나에게 겁박은 먹히지 않는다. 총구는 결코 내게 죽음과 삶을 가를 도구가 되지 못한다. 나(류준열)는 나를 모르기에 내가 죽은 들 슬퍼하는 법도 알지 못한다. 그(조진웅)는 이런 나를 몰랐을 테니 내게 분노했던 시작점부터 패배한 셈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개들의 섬, 좋은 개 나쁜 개 이상한 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