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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Jul 18. 2018

청년 마르크스, 나의 가난한 공산주의자

라울 펙 감독. 청년 마르크스






명문가 자제 예니 폰 베스트팔렌(빅키 크리엡스)은 유대인 집안 카를 마르크스(오거스트 딜)와 결혼한다. 모두가 말렸고 예상은 대체로 맞았다. 카를은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로 나뉜 세상을 전복시키기 위한 사상에 골몰하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한마디로 대의명분을 좇느라 바빴다. 아기는 울고 늘 굶주렸으며 집은 좁고 낡았으며 오래된 집기들로 가득했다. 일상을 영위하는데 어느 하나 괜찮지 않았다. 당장 헤어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무한한 헌신과 애정, 믿음으로 보일 정도였다. 서로를 결박하고 있는 애정에 비해 살림은 피폐하기 그지없었다. 예니는 부유한 집으로 돌아가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었지만 신념을 저버리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선택은 끝났고 카를에게 전부를 걸었다. 아름답고 무엇보다 지적이었다. 남편이 무려 <공산당 선언>을 통해 체제를 뒤집어버린 장본인이 아니었다면 좀 더 주목을 받았거나 혁명의 기능적 역할을 하는데 두각을 나타냈을지도 모른다. 예니가 카를에게 바라는 건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게 원고료라도 벌어오는 것이었다.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아이들은 계속 태어났다. 


카를은 프리드리히 엥겔스(스테판 코나스케)라는 운명적 동료와 만난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대한 직간접적 경험과 탄탄한 지성을 갖춘 부르주아였다. 공장주 아들로 태어난 엥겔스가 평생 보아온 것은 지배계급의 아버지와 그 밑에서 헐벗으며 일하고 죽어가는 노동자들이었다. 입 다물고 가지고 태어난 걸 누리기만 했다면 아니 그가 학습한 지성을 되려 악용했다면 그저 악랄한 부르주아 중 한 명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엥겔스는 부조리를 거부했고 노동자들에게 기꺼이 접근했으며 기록하고 변화를 도모했다. 카를 마르크스와 함께 <공산당 선언>을 집필 후 공표했고 이전부터 금전적 위기에 처한 카를을 오래 도왔다. (돕지 않았다면 <공산당 선언>은 아마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인간적 연민이라기보다는 혁명 과업의 완수를 위한 부대 비용으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카를은 일찍 가장이 된 자였다. 엥겔스는 카를의 열정을 부추기며 더 많은 글로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기 바랐지만 카를은 남편이었고 여러 자녀를 둔 아빠였으며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 체제의 약자였다. 단 한 번도 벗어날 엄두조차 내지 못한 가난은 너무 큰 장애였다. 예니는 늘 힘들어했고 카를에 대한 사랑과 응원은 변함없었지만 그럼에도 늘 고통과 슬픔에 휩싸여 있었다. 


예니가 없었다면 카를도 없었다. 공산당 선언도 없었고 노동자들의 입장을 이론과 실행으로 추진하며 세상을 전복시킨 혁명도 없었을 것이다. 세상을 작동시키는 시스템의 일부를 영영 바꾼 사상가로서 성공한 카를이었지만 실패한 가장이었다. 카를의 모든 주장이 자본가들의 개선 의지 없는 노동 계급 착취에 대한 공격과 이런 사회 시스템을 뒤집을 내용으로 수많은 지지와 혁명의 불꽃으로 작용했지만, 그 뜨거움은 아이와 아내가 기다리는 집안의 온기로까지 전해지지 못했다. 그는 영원한 역사가 되었지만 그의 아내와 아이는 그림자 속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카를이 펜을 꺾고 육체노동으로 돈을 벌었다면 아마 더 많은 노동자가 죽고 더 많은 자본가가 시스템에 기댄 이익을 취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가정이고 카를은 고독한 가난 속에서 거대 사회의 모순된 구조를 뒤집었다. 그의 업적에 대한 비난을 누가 가할 수 있을까. 청년 마르크스를 보는 내내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혁명엔 반드시 희생이 따르고 그 희생이 내 가장 가까운 이들이 되어야 한다면 나는 영영 혁명의 일부가 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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