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토 <쓴다고 달라지지 않겠지만> 다섯 번째 주제 '사랑'을 준비하며
우리는 이렇게 자신의 결여를 깨달을 때의 그 절박함으로 누군가를 부른다.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향해 할 수 있는 가장 간절한 말,
‘나도 너를 사랑해’라는 말의 속뜻은 바로 이것이다. ‘나는 결여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신형철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지 않은지가 중요한 것이 사랑의 세계다.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때,
우리 사이에는 격렬하지 않지만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난다.
함께 있을 때만 견뎌지는 결여가 있는데,
없음은 더 이상 없어질 수 없으므로,
나는 너를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신형철
어떤 문장도 삶의 진실을 완전히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면,
어떤 사람도 상대방을 완전히 정확하게 사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표현되지 못한 진실은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지만,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을 느낀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신형철
사랑받는 사람이 되는 가장 정확한 방법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정확한 길이기는 하지만, 쉽고 빠른 길은 아니다.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타인과의 섬세하고 복잡한 커뮤니케이션에 성공해야 한다.
그 어렵고 느린 길을 걸을 능력도 의지도 없는 이들은
그 대신 권력을 가지려 한다.
권력을 얻어 명령의 주체가 되면
커뮤니케이션을 생략해도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신형철
누구도 기다리지 않았지만, 쓰고 싶은 글들을 쓰기 위해 사랑이란 소재를 사용해왔다. 다음 글을 쓰기 위해 이전 글의 표현들을 되도록이면 피하려 했다. 불가능한 일. 나는 다 기억하지 못했고 이건 아마도 새롭거나 낯설거나 조금 근사하지 않을까 싶어서 이전의 글들의 감정과 표현을 복제해왔다. 겉으로 그렇게 보이지 않더라도 결국 빌려온 셈이다. 감정을 낱낱이 쪼개어 스테인드 글라스처럼 서로 다른 색과 모양의 조각으로 하나의 세계를 만들고 싶었으나, 가능할지 모르겠다. 난 여전히 사랑에 대한 소재를 다루며 글을 쓰고 있고 초안조차 제대로 썼는지 의문이다. 어쩌면 거대한 문고리만 잡은 채 본진에는 발도 못 딛고 서성거리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영원히 탐구하고 싶고 망설여지는 대상, 방향도 대상도 목적도 의미도 과정도 시작도 끝도 변수도 어느 하나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소재, 사랑은 세계이자 정의이고 무형의 존재이자 완전히 오염된 대기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쓰일 수밖에 없다. 모두가 말하고 아무도 모른다.
불가항력이더라도, 사랑을 정의하는 일은 지루하다. 차마 표현되지 못한 감정이 이미 표현된 문장들에 이입되어 형태를 갖춘다. 정확히 들어맞을 리 없는 문장, 단어, 자간, 행간의 틈바구니에 감정을 끼워 맞춘다. 그렇게 무형의 감정은 유형의 문장이 된다. 나의 마음은 타인의 문장이 된다. 타인의 문장은 나의 간판이 된다. 나는 그 간판을 따라 읽으며 감정의 대상을 다시 정의하고 나의 현재 상태를 정의하며, 박제하려 시도한다.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타인의 문장이라는 그릇에 담아 진정시킨다. 타인의 문장은 소화기가 되고 진정제가 되며 캔버스가 되고 선과 면으로 둘러싸인 한정된 공간이 된다. 그제야 감정은 가시권에 들어온다. 나는 내 감정이 어떤 성분인지 말할 수 있다. 한없이 낯설던 세계의 일부를 받아들일 수 있다. 착시. 완전히 들어맞지 않지만 가장 이상적인 편안함을 지닐 수 있다. 이것이 내 상태, 내 감정, 내 사랑, 그리고 나.
문장을 통해 사랑에 빠진 나를 확인하는 일은 부끄럽긴 해도 지루할 수 없다. 그 황홀감은, 표현의 주체가 타인이 아닌 자신으로 옮겨질 때 다시 한번 극대화된다. 그제야 형용하기 힘들었던 나의 이상한 세계의 벽돌을 내 손으로 직접 만들고 쌓아 올려 얼마든지 다듬을 수 있게 된다. 영원히 수정하더라도 영원히 내 것이다. 이것은 다시 한번 사랑에 빠진 자신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점점 더 자신의 감정 안으로 어둠을 밀어내고 들어가려고 시도하는 일이다. 벼락 치 듯 사랑의 전류를 내뿜는 존재에게서 건너온 감정을 매만지고 내 안으로 밀어 넣고 나조차 같이 빨려 들어가고 결국 나의 감정 안에 나의 표현 안에 내가 함몰되는 일이다. 헤어 나오기 싫고 헤어 나오지 않는다. 경계는 닫히고 사랑에 빠지고 표현하는 자로서 외부의 개입을 단호하게 차단한다. 나를 이렇게 만든 사랑의 원본이 문을 두드려도 반응하지 않는다. 나의 감정은 누군가에게로부터 복제되었다는 진실에 귀를 막는다. 사랑을 글로 표현하는 순간, 내가 원본이라는 착각에 빠진다. 사랑의 감정과 사랑의 대상과 사랑을 글로 쓰는 일은 이렇게 분리된다. 각각의 영토에 갇힌다.
사랑을 쓰는 일은 사랑과 별개다. 감정을 떼내고 접고 오려내어 문장에 붙인다. 수없이 변형되고 가공되며 글의 틀에 최적화된다. 사랑을 쓰는 일은 글을 쓰는 일과 마주할 수밖에 없고, 글의 한계와 마주할 수밖에 없다. 애석하게도 사랑의 한계는 글의 한계가 된다. 표현의 영역에서, 읽히고 보이고 쓰이고 지워지고 제출되고 들리고 공유되는 과정에서 사랑을 쓰는 일은 사랑에 대한 글이 되어 글의 한계와 격돌한다. 글의 영역만큼 사랑의 영역도 한정된다. 어떤 이에게 글의 영역은 너무나 깊고 넓어 아무리 쓰고 채워도 사랑은 글의 벽에 부딪치지 않지만 또 어떤 이에게 글의 영역은 너무나 얕고 좁아 금방 채워지고 부딪혀 원하지 않는 형태로 마감될 것이다. 글의 세계가 확장되지 않는 이상 사랑은 이렇게 오해된다. 다른 표현으로 마침표를 찍게 된다. 오해는 더 큰 오해로 돌아올지도 모른다. 나중에 읽었을 때, 당시 내 감정에 대해 편협하게 해석하게 만든다. 사랑을 확신하고 나를 확인하기 위해 사랑을 쓰려했던 시도들은 불완전한 글의 세계에서 부유하고 있다. 사랑은 수학과 다르겠지만 답을 제대로 쓸 수 없는 사랑은 고통스럽다. 고통의 과정을 좋아할 수도 있겠지만 대다수의 우리는 시간이 없다. 우리가 축조할 수 있는 글의 세계가 곧 사랑의 세계가 될 것이다. 우리에게 가능한 최대치의 사랑의 정의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