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타인, 완벽히 들킨 거짓말

이재규 감독. 완벽한 타인

by 백승권







관계는 완벽을 전제로 유지될 수 없다. 완벽한 만족을 추구하는 관계는 끊임없이 방해받는다. 개인과 개인은 관계 안에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욕망을 품는다. 관계에 대한 합의를 벗어나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모든 일탈 과정은 은밀하게 진행된다. 들키는 순간, 관계는 끝이니까. 합의에 위배된 행동을 하면서도 관계가 종결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기존의 관계에 종속되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관계에 탐닉한다. 이중성. 모두들 자신을 위로하느라 바쁘다.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현재의 계약을 무시하고 만다. 결혼이라는 계약 관계는 구속으로 치부된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상기하고 애써 소환하지만 더 이상 효력이 발생하지 않는다. 가장 가까운 사람을 배반함으로써 가장 농밀한 쾌락에 도달한다. 관계를 파괴시키려는 행위는 본능인가. 수많은 조상들이 그렇게 살아서 후손들도 그렇게 행동하는 건가. 아주 멀리서 이런 관계들을 바라보는 건 흥미롭다. 수컷의 머리를 떼어먹는 암컷 곤충을 클로즈업하거나 끝내 목덜미를 물어뜯어 쓰러뜨리고 마는 초원의 사냥 장면을 면밀히 들여다보는 방송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게 바로 지금 같은 테이블 옆자리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면? 내 휴대폰 안의 비밀이 함께 앉은 모두에게 까발려지는 일이라면? 누가 쓰러진다고 끝나는 게임이 아니다. 드러난 진실은 기억을 교체한다. 교체된 진실은 영원히 웃음거리가 된다. 수치와 모멸감은 무덤까지 이어질 것이다. 누가 감당할 수 있을까.


정신과 의사(김지수)가 게임을 제안한다.

제한 시간 내 개인 휴대폰의 모든 내용을 공개할 것. 메시지, 통화, 사진까지, 심연의 컨테이너 박스가 열린다. 정신과 의사에겐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물론 해당 게임이 일으킨 거대한 파열음으로부터 최초 제안자 역시 피해 갈 수 없었다. 인간의 호기심이란 많은 경우 화를 부른다. 예측할 수 없는 흥미를 위해 많은 대가를 치른다. 분위기가 어쩔 수 없었다는 이유로 따라가고 같이 망한다. 익명의 누드사진이 도착한다. 익명의 투자사기 관련 전화가 걸려 온다. 익명의 전 애인이 문자를 보낸다. 익명의 임신 사실이 밝혀진다. 익명의 메시지가 너는 동성애자라고 밝힌다. 익명의 메시지가 숨겨온 방문지를 노출한다. 익명의 일정 알림이 왕따를 알린다. 맥락은 무시된다. 게임 시간 내 모든 정보가 자극적으로 소비된다. 감정은 폭주한다. 욕설이 난무한다. 당혹과 비난, 변명과 수습이 창과 칼처럼 교차한다. 피해자가 속출한다. 가해자의 동공이 확장되고 얼굴이 붉어진다. 게임은 중단될 수 있었다. 하지만 계속된다. 나만 당할 수 없으니까.


우리, 아니 그들은 대체 무엇을 믿었나. 인간과 인간, 아니 애정 관계, 아니 부부 사이란 얼마나 허술한가. 미풍만 불어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카드로 만든 집과 뭐가 다른가. 파도 한 번에 허물어지는 모래성과 뭐가 다른가. 불씨 하나로 완전히 전소되는 성냥개비를 쌓아 만든 탑보다 나을 게 뭔가. 인간사회에서 이미지란 카드의 패를 까지 않았을 때 보이는 손등의 보석이나 긴장을 감춘 여유로운 포커페이스 같은 것. 휴대폰이 울리는 순간 내면의 악마가 비명을 지르며 튀어나와 모두를 할퀴고 난도질한다. 위태롭게 견지되던 일상의 모든 균형이 날카로운 유리에 베여 피투성이가 된다. 눈물범벅이 된다. 잠긴 문이 된다. 끝날 때까지 문은 열리지 않는다. 문이 열리는 순간 기존 관계는 끝난다. 모임은 해체된다. 게임은 끝난다. 각자의 집에 돌아간다. 처음 같이 온 사람은 곁에 없다. 같이 와서 홀로 나간다. 정신과 의사는 무엇을 얻었나. 아무것도. 어떤 모험은 죄책감과 피해의식만 남긴다. 그날 밤, 게임에서 이긴 자는 아무도 없었다. 타노스가 있었다면 되돌렸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현실은 모두 파괴되었을 뿐이다.


비밀이 관계를 유지한다는 말은 우습다. 비밀이 들켰을 때 관계는 끝난다라는 말과 동일하다. 맥락을 파헤치고 파헤쳤을 때 화해의 순간에 도달할지도 모르지만, 당혹한 인간은 인내심을 잊는다. 듣고 싶은 말이 들리지 않으면 믿고 싶은 대로 끝까지 믿는다. 후회를 직감하면서도 모든 후회를 저지른다. 누군가는 경험으로 이를 체득하고 비밀을 관리한다. 들키고 싶은 비밀과 들키지 말아야 할 비밀을 나눈다. 하지만 모두가 자신은 너무 바빠서 이럴 수 없다고 말한다. 비밀을 공유하고 비밀을 거래하며 비밀을 확산한다. 비밀은 공공재가 되고 걷잡을 수 없이 재생산되며 결국 부메랑이 되어 근원지를 폭파시킨다. 애초 이런 목적으로 모두가 아는 비밀을 퍼뜨린 사람도 있을 것이다. 불구경은 재밌으니까. 가까이 있다가 조금 화상을 입더라도 타인의 관계가 불타는 장면만큼 팝콘각도 없을 테니까. 인간은 비밀을 감당할 수 없다. 비밀은 생성되는 순간 자체의 동력과 생명력으로 모든 사람과 장소로 뻗어나간다. 모두가 잠든 순간에도 휴대폰을 통해 비밀은 지구 전체로 확산된다. 네 이웃의 비밀을 말하지 않을 자 누구인가. 휴대폰과 SNS가 끝내 형장에 매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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