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국희 감독. 국가부도의 날
IMF 사태 같은 일은 단숨에 요약하기 어렵다. 관점이 다르다. 해석이 다르다. 영향도 다르고 이후 결과도 다르다. 각자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바람을 맞는다. 정책을 결정하는 곳, 가족을 먹여 살리는 곳, 있는 돈을 더 불릴 기회를 엿보는 곳, 조직에서 버티며 하루 벌고 하루 사는 곳,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 다른 세기의 바람과 마주한다. 완전히 날아가거나, 버티다 날아가거나, 광풍을 타고 천공으로 치솟기도 한다. 몸이 뒤집히고 팔자도 같이 뒤집힌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현실은 순식간에 천국과 지옥으로 나뉜다. 물론 고요한 곳도 있었겠지만, 영화는 양극단으로 가는 자들의 그림자를 비춘다.
윤정학(유아인)은 무덤터를 미리 사놓은 자다. 국가 부도를 눈치채고 최악의 수에 베팅한다. 그리고 승리한다. 그는 절망하는 자들의 살풍경을 앞에 두고 자신의 인생이 완전히 바뀔 수 있음을 직감한다. 이미 시작되었음을. 예상이 현실이 되었고, 전략은 사상 초월의 수익으로 돌아올 거라고. 기존 고객들을 통해 투자금을 구하고 이후 수익으로 목이 매달린 집을 전전하며 재투자한다. 죽은 자들이 늘어날수록 미리 사놓은 무덤터는 꽉꽉 채워지고 윤정학은 부자 이상의 부자가 된다. 사이코패스처럼 모두가 죽어가는 풍경을 즐기지는 않았지만 사이코패스처럼 냉정할 수 있었다. 죽은 자들의 피와 뼈를 모아 빌딩을 세운다. 가장 높은 곳에서 자본의 중심이 된다. 여전히 바람 위에 올라타기만을 노리며.
갑수(허준호)는 먹이사슬의 가장 말단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자였다. 자급자족으로 연명해야 하는 삶에서 상위에서 일으킨 생태계 교란의 나비효과로 인해 완전히 말살의 위기에 몰린다. 약속은 휴지가 되고 돈은 숨통을 조인다. 주변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죽고 다치고 감옥에 갔다. 갑수는 바쁘게 움직여도 한계가 있었고 한계를 넘을 수 없었다. 위에서는 모든 사다리를 걷어찼고 남는 건 채무독촉과 압박감이었다. 몸과 마음이 분리되었고 자살은 그 어느 때부터 자연스럽게 보였다. 그에게 미래는 아이들이었고 아이들이 그의 아킬레스건에 매달려 투신으로 가는 걸음을 늦추고 있었다. 피가 빠져나가듯 울었고 살 길은 없었지만 죽지 말아야 할 이유는 명징했다. 갑수는 죽지 못해 산다. 그가 살아야 도미노처럼 아내와 아이들도 살 수 있었다. IMF 당시 대한민국에서는 수많은 갑수들이 죽었다. 남은 갑수들이 싸우며 일하고 있지만 여전히 다른 갑수들은 지금도 실직과 채무, 책임 사이에서 압박당하며 무덤가를 두드리고 있다.
한시현(김혜수)은 히어로였다. 팔다리와도 같은 팀원들과 뭉쳐 광풍에 맞서 싸운다. 시스템이 재부팅되기 일보 직전이었고 보안 패치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기존 설정들이 모조리 뒤바뀔 타이밍이었다. 대한민국이 무덤터로 변할 위기에 가장 적극적인 해결책을 모색했고 사선 위에서 총력을 다해 고군분투했다. 그리고 완전히 졌다. 내부의 그 누구도 한시현 팀의 편은 없었다. 모두가 무너질 줄 알고 탑을 쌓았고 판을 뒤집어 이미 유리했던 자들을 더 유리하게 만들어줬다. 더 어려운 길보다 덜 어려운 길을 택했고 소수만 살아남기로 작정한다. 한시현은 원더우먼처럼 망토를 날리며 대응했지만 세상의 일부가 되어 세상 전체를 바꾸는 일은 불가능이라는 점을 깨닫고 무너진다. 개인을 버린다 해도 살릴 수 있는 게 없었다. 한시현은 자신이 얼마나 무력했는지 통감한다. 그리고 먼저 무너진 자가 다가와 도움을 요청했을 때 한번 더 회복불능의 충격에 휩싸인다. 위기는 원거리가 아닌 바로 곁에서 불타고 있었다. 다리 위에서 투신한 자는 더 이상 타인이 아니었다. 한시현은 계속 싸우는 자로 남는다. 세상의 수많은 갑수들의 투신을 막기 위해.
영화는 1997년의 결과보고서처럼 진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