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동혁 감독. 도가니
내 생애 이렇게 욕하면서 본 영화는 없었다. 분노가 치밀고 삭히지 않는다. 어른이 아이를 가해하고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가해하고 가해자를 공권력이 비호하고 가해자를 종교가 비호하고. 법과 신이 무슨 소용 있나 싶었다. 사탄의 자식들은 그 자체로 악이지만, 이를 둘러싼 기도와 찬송에서 신의 선의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인간의 욕망이 종교의 세력을 키웠고 그 안에서 악마들이 육성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저게 실화라면 대체 세상이 어떻게 미쳐 돌아가는 건지 어지럽고 비통할 뿐이다. 말과 귀가 어두워 일반적인 의사소통에 서툴고 부모가 없어 보호받을 곳 조차 없다는 이유로 참혹한 폭력과 성폭행을 당하는 아이들, 자신을 '소중하지 않게' 여길뻔한 섬뜩한 시간들.
영화 도가니를 보았다.
그곳에서 악마를 보았다.
그(공유)는 미술 한다고 처자식 소홀히 하던 남자였다. 결국 아내와 사별했고, 아이는 노모에 맡겨졌다. 그는 교수의 소개로 장애아동들이 있는 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게 된다. 5천만 원을 (뇌물로) 내고. 한밤 중 빈 복도를 울리는 처절한 울음소리. 그는 현장에 접근하려 하지만 제지당한다. 그렇게 넘어간다. 그렇게 그 시간에 한 소녀는 파괴당하고 있었다. 그는 그때 아마 더 알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때 그렇게 넘어간 죄책감에 끝까지 사투를 벌였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정의감도 물론이지만, 무엇보다도 이런 방식으로 자신에게 용서받고 싶었는지도.
남자아이. 여자아이. 말하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아이. 모두 아이들이었다. 법적으로 보호받을 권리를 갖고 태어난 생명들이었다. 하지만 그 아이들은 아주 긴 시간 극악의 폭력과 성폭력에 시달린다. 온몸과 마음에 피멍과 생채기가 가실 날이 없었다. 울음이 멈출 날이 없었고 아이들의 표정은 두려움으로 가득해져 갔다. 어떤 의식도 다 형성되지 못했을 그 어린 나이에 고통뿐인 삶을 원망했을지도 모르겠다. 도리어 자신을 미워하다가 생을 그만 멈추고 싶어 했을지도 모르겠다. 보호가 필요했다. 절실히.
자애학원. 장애를 지닌 아이들을 돌본다는, 그곳의 어른이란 새끼들은 선생이라는 가죽과 기독교 장로라는 가죽을 뒤집어쓰고 사회적 최소 약자들을 유린하고 있었다. 영화는 장편 다큐가 아니어서 극히 일부만 묘사되었을 것이다. 그 일부가 아이들의 머리를 돌아가는 세탁기에 집어넣어 고문하고 손과 발을 테이프로 묶어 성폭행을 저지르는 일이라면 나머지는 어떤 현실로 채워졌다는 것일까. 아이들이 감당한 건 겪은 건 무엇이었을까. 어른이라도 매일 죽음을 꿈꿨을 그 가혹행위 안에서 아이들은 어떤 희망으로 내일을 기다렸을까. 손가락이 떨린다. 차마, 상상도 못 하겠다.
악은 증식하더라. 비호세력과 함께. 경찰이 변호사가 그리고 눈먼 판사가 검사까지도. 그리고 신을 섬긴다는 교회도. 영화는 말하고 있었다. 아무도 그 아이들을 지켜주지 않았다고. 시스템은 아이들이 아닌 악마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권력욕과 물욕과 변태욕이 한데 모여 미친 연극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가해자가 같은 교회 성도라는 이유만으로 뒤에서는 찬송과 기도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누구를 위한 기도인가. 신을 잊은 건 누구인가. 너희들이 따르는 건 누구인가. 너희들도 새벽기도를 나가겠지. 너희들도 가족을 위해 손을 모으겠지. 너희들도 아프고 괴로울 때 신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겠지. 인간이니까 어쩔 수 없다는 소리는 지옥에 가서나 했으면 좋겠다. 너희들이 보호하려는 악마들한테 아이들은 스스로가 누군지 알기도 전에 짓밟혔다.
말하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아이들이라는 점이 자꾸 사무친다. 수배 더 깊었을 폭압의 고통이 머리와 가슴에서 떠나가지 않는다. 사람들은 진실에 조금 더 가까이 가야 한다.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 누가 그랬다. 변화는 참여에서 온다고. 난 아이들에게 다가가 말과 글을 가르치고 음악과 미술을 가르치고 식사와 생활을 같이 할 수 없다. 다만 작은 물질을 보태거나,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에 의견을 더하거나, 이 추악한 시스템을 바꿀만한 힘을 가진 이들에게 투표할 뿐이다. 아이들이 비교적 열악하나마 비슷한 수준의 혜택과 사회적 배려라도 받을 수 있도록 꾸준한 관심과 참여를 통해 보여줄 뿐이다. 니들은 소중하다고. 혼자가 아니라고. 그걸 조금이라도 잊지 않게 해주는 게 한 살씩 더 먹어가는 어른이 보여줄 수 있는 최소한이 아닐까. 햇볕을 보는 것조차도 부끄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