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스 스피치, 말더듬이 남자와 결혼한다는 것

톰 후퍼 감독. 킹스 스피치

by 백승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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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운명이다. 어떤 정자와 난자에게도 스스로의 선택권은 없다. 발가벗겨진 채 울음을 터뜨리며 태어난 이후에도 자신의 앞날을 결정할만한 선택권이 발급되는 건 아니다. 환경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계층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선조들이 형성한 가문이라는 명패에 쓰인 타이틀의 브랜드 가치와 인지도는 자손들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관여한다. 시간과 다수의 이기가 축적된 시스템. 어떤 성격이냐에 따라 책임과 혜택의 부여 정도가 다르다. 그게 왕족의 사내라면 더더욱, 그것도 1939년 영국이라면 더더더욱, 태어나자마자 남겨진 나날들에 해야 할 일들은 너무도 자명하다. 운명이다.


이런 거대한 운명을 지닌 이에게 말더듬증은 가혹하다. 대중 앞에 서는 일이 평생직업. 명령하고, 설득하고, 결정을 말로 전달해야 하는 게 평생 미션이다. 글은 누가 대신 써줄 수 있지만, 그 글을 모두를 대표해 읽어야 하는 위치다. 파장은 어마어마하다. 사회지도층 최고 상위 레벨로서 그의 말은 자국과 식민지의 만민들의 눈과 귀를 장악한다. 모 아니면 도, 천국 아니면 지옥, 솔직히 잘해야 본전이고 못하면 전 지구적으로 욕먹는 위치다. 당시는 라디오였지만 인터넷이 있었다면 아고라 퇴진 서명이 수억 명에 달했을지도 모른다. “(긴 침묵)…………. 여, 여, 여, 여러분…” 자신이 속한 사회의 비전을 제시하는 순간을 이런 청각적 장애를 겪으며 듣고 싶은 대중은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시시각각 닥치는 국가적 위기에 대처하고 국민의 의지를 하나로 모으기엔 왕의 말더듬증은 독약이었다.


라디오는 꺼버리면 그만이지만, 남편을 정하는 일은 다르다. 2011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만연한 물질만능주의라면 고민의 여지가 적겠지. 여왕이라니. 꿈도 꾸지 못할 부와 명예를 광속으로 득템 할 찬스. 하지만 어느 시대나 국가의 경계를 넘어 의식 있는 여자들은 존재한다. 그녀는 거절했다. 그것도 두 번이나. 자신의 생을 왕실이라는 틀에 박힌 삭막한 공간과 바꾸기 싫었다. 하지만 마음을 고쳐먹었다. 세상이 치명적인 단점이라고 수군거리는 그의 말더듬증을 보며 그녀는 남다른 매력을 보았다. 그리고 결정했다. 이 남자를 닮은 아이를 낳고 평생 같이 하겠다고. 동정도 동경도 아니었다. 남편의 지위가 드리운 그늘을 벗어나지 못할 그 외로운 길을, 그녀는 남자의 말더듬증을 보며, 이를 극복하려는 그의 귀여운 의지를 보며, 결정했다.


헬레나 본햄 카터가 연기한 엘리자베스 여왕, 그녀가 계속 눈에 밟힌 건 <킹스 스피치>를 두 번이나 봐서만은 아니다. 선왕 서거 후, 치맛바람 거센 유부녀와 바람 난 형을 대신해 대영제국의 왕에 오르게 된 조지 6세(콜린 퍼스). 그는 즉위 이후 첫 연설을 마치고 부담감을 못 이기며 울음을 터뜨린다. 왕의 고뇌, 전쟁이 닥친 난국과 국민의 불안함이 주는 과중함은 어깨보다 혀끝을 더 떨리게 만들었을 것이다. 조용히 문을 열고 다가온 그녀는 그의 뺨을 어루만지며 가볍게 키스한다. 위로한다. 당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말더듬증이 내가 당신을 선택하게 한 이유였다고. 왕은 운명을 이어받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선택했다. 말더듬증,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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