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 기생충
벌레들은 지하에 산다. 설국열차로 치면 꼬리칸이다. 처음부터 벌레는 아니었다. 지상에서 지하로 서식지를 옮겨야 했고 이후 벌레가 되었다. 치킨이 망하고 카스테라가 망하면서 인간 가족은 벌레들이 되었다. 지상에서는 보이지 않는 바닥에 앉아 박스를 접었다. 대충.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상 경쟁에서 패배하고 내쫓긴 벌레들은 생존본능이 강하다. 상황대응력과 판단력이 좋다. 다시 생각해보니 불행이다. 계획이 있었다. 무계획 같은 계획. 다른 벌레를 죽이고 자신이 그 자리의 새로운 벌레가 되는 것.
순식간에 벌레 가족은 지상으로 올라온다. 한없이 굽신거려야 했지만 부스러기를 먹을 수 있었다. 필라이트 마시다가 삿뽀로를 마시게 된다. 팬티도 흘려야 했고 같잖은 소리도 해야 하며 동종 벌레의 밥줄도 끊어야 했지만 아무렴 어떤가. 멍청한 인간들과 같은 냉장고를 쓸 수 있는데. 인간이나 벌레나 남자끼리 (무전기라도 동원해서) 소통을 시도하고, 여자끼리는 (짜파구리 혼자 다 처먹었다고 소리 지르며) 냉대한다. 어느 날 인간 가족이 집을 비운다. 벌레 가족의 파티 타임 시작.
과외 벌레(최우식)는 한낮의 햇볕에 몸을 태운다. 지하에서는 상상도 못 했던 일, 이렇게 하늘을 꿈꿨다. 그저 누워서 햇볕을 덮는 일. 부모 벌레는 모른다. 자신들의 판단과 결정이 자식들의 하늘을 빼앗았다는 걸. 자식들을 벌레들로 만들었다는 걸. 부모 벌레들도 빼앗긴 게 많았겠지. 그게 부모 벌레들의 면죄부인가. 그럴 리가. 자식 벌레 덕에 다시 햇볕 보며 일하게 된 부모 벌레들에겐 책임감이 보이지 않는다. 염치없는 세대들. 그들은 그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도 모른다. 자신들의 무계획이 세상을 어떻게 더럽혔는지.
쫓겨난 아내 벌레(이정은)가 찾아온다. 굶어 죽어가는 남편 벌레(박명훈)를 살리기 위해. 소리 지르며 계단을 타고 밑으로 한없이 내려간다. 지하라는 무덤, 지상에서 패배해 죽은 자들의 서식처, 안도의 공간. 지하에서 온전히 하나가 되는 이 둘에겐 벌레 가족에게서 느껴지지 않는 기묘한 애착과 헌신이 있다. 부부지만 유사 모자관계로 보인다. 피골이 상접한 남편 벌레에게 달려가 젖병을 물린다. 행복해하는 남편 벌레. 그들은 무수한 짝짓기를 하지만 성실한 피임으로 번식 차단에 성공한다. 부유한 인간에게 기생하며 몇 년 부스러기 좀 먹고사나 했는데. 다른 벌레 가족이 위대한 령도자 동지 같은 인간을 현혹해 단숨에 내쫓겼다. 이 사기꾼 벌레 새끼들. 벌레들끼리 싸우기 시작한다.
한쪽이 머리가 터지고 꽁꽁 묶이기 전까지, 아니 인간 가족이 제자리로 돌아오기 전까지 벌레들의 싸움은 멈추지 않는다. 인간 가족의 직립 보행이 공간을 재 장악하자 벌레 가족은 다시 사족 보행으로 기어 다니며 어둡고 습한 곳에 숨는다. 잠시 인간 흉내를 낼 수 있어서 행복했는데. 인간과 결혼하고 사돈을 맺고 이 집을 차지하는 꿈을 꾸며 박장대소했는데. 과외 벌레는 계획이 있었다. 배를 채웠고 햇볕을 쬐었고 그러다 감정까지 품게 되었다. 나도 맘에 드는 어린 인간 여자와 섹스할 수 있어. 인간을 사랑하게 된 벌레는 어떤 방해도 용납할 수 없다. 가난의 경쟁자들을 다 죽이도록 한다. 살충을 실행하자. 그러다 철사에 목이 감기고 가져간 돌에 처맞아 머리가 터진다.
어린 남자 인간(정현준)의 생일 파티는 살충 파티가 된다. 피신 중 손이 베였던 미술 벌레(박소담)는 다른 벌레의 칼에 찔려 최후를 맞는다. 애비라는 벌레는 그 순간에도 상처를 짓누르며 고통을 더할 뿐 딸을 구하지 못한다. 그 순간에도 자신이 벌레인지 인간인지 아빠인지 기사인지 헷갈려한다. 결국 자신이 따르던 남자 인간(이선균)에게 차키를 던지고 자기 딸의 죽음을 택한다. 같은 시간, 어린 여자 인간(정지소)은 다시 인간이 되려다 머리가 터져버린 과외 벌레를 엎고 뛰고 있었다. 젊은 날 투포환 메달리스트였던 애미 벌레(장혜진)는 딸을 죽인 벌레의 내장을 쑤셔 숨통을 끊는다. 남자 인간은 차키를 찾기 위해 벌레를 뒤집으며 악취에 코를 막는다. 선을 넘은 냄새. 방금 자식 벌레의 죽음을 겪은 애비 벌레(송강호)는 버튼이 눌린다. 나는 벌레 같이 사는 벌레가 맞지만 너한테 계속 벌레 취급당해도 괜찮은 그런 벌레는 아니야. 벌레의 칼이 인간을 쑤신다. 살충과 살인의 아수라장. 애비 벌레는 어둡고 습한 곳을 찾아 본능적으로 숨는다. 혼자 숨는다. 죽고 다친 가족을 버려둔 채.
실제 발생한 연쇄살인 사건을 다룬 살인의 추억을 제외하더라도, 봉준호 감독의 많은 영화에서 도드라지는 희생자는 (상대적으로) 어린 여성이었다. 마더, 괴물, 이번 기생충까지. 여학생, 막내딸, 이번에도 역시 가족 중 가장 어린 여성 구성원. 이런 설정이 자조인지 풍자인지 끊임없이 반복하며 대사로 등장했던 상징과 계획인지 모르겠다. 사회에 대한 감독의 관점인지, 갈등 구조의 클라이맥스를 위한 극적 장치인지, 아니 둘 다인지, 아니 대체 꼭 이런 설정을 반복해야 했는지. 대한민국이라는 (봉준호의 영화에서) 반복되는 물리적 사회적 배경에 대한 해석일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술의 의무일 수도 있겠지. 어린 여성의 희생과 죽음의 전시와 관람 행위를 통한 현대 사회 구성원들의 자각 유도. 이건(내 의견은) 예술가의 기호에 대한 호불호일 수도 있다. 왜 굳이 사회에서도 약자인 어린 여성을 영화에서도 계속 반복적으로 죽이는가. 영화적 선택인가. 감독 개인의 사상인가. 영화 괴물에서 현서(고아성)의 최후를 여전히 납득하지 못하고 있는 난, 같은 이유로 기정(박소담)의 최후를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기생충에서 봉준호가 그리는 대한민국은 여성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다. 책임을 피해 사라지거나, 청소 기계를 돌리며 최소한의 애도마저 방해한다. 그래, 벌레 한 마리를 청소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