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와 금기, 알렉산더 맥퀸의 빛과 끝

이안 보노트, 피터 에트귀 감독. 맥퀸

by 백승권




제 어두운 면의 끝까지 가서

그 안의 공포들을 꺼내

무대 위로 올려요.


모든 디자이너는 환상을 만들고자 해요.


실업수당으로 버티고 있었어요.


초반은 정말 행복한 나날이었죠.

짧았지만 아름답고 재밌었죠.


알렉산더한텐 70만 원만 줘도 30벌은 만들 거예요.


아주 깊은 곳으로 향하는 어둠


'나 어렸을 때 매형한테 당했어'


어릴 때 리는 가정폭력을 목격했고

정신적으로도 영향을 받았을 거예요.


25일 동안 55벌을 준비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죠.


세트는 스탠리 큐브릭과 정신병원이 만난 느낌이었죠.


패션은 큰 거품이고 가끔 전 그걸 터뜨리는 기분이죠.







죽은 천재에 대한 이야기는 안전하다. 천재는 자극적인 소재이고 이미 죽었다는 사실은 세상이 격찬한 천재성을 동시대인들만이 독점했다는 엄청난 가치를 부가한다. 천재와 같은 시간대를 살았다는 것만으로도 남은 자들의 삶이 다르게 해석되게 만든다. 그의 쇼를 지켜보고 그의 기록을 읽었으며 그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에 대해 몇 마디 나눴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천재의 시대를 지나온 사람들이 된다. 천재를 알고 천재에게 놀라고 천재를 좋아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천재의 일부가 된다고 여기는 것이다.


스토리의 끝이 비극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 생물학적이든 사업적이든 천재의 추락은 동시대의 천재 신화라는 거대하고 복잡한 퍼즐을 완성하는 완벽한 조각이 될 테니까. 천재는 죽음으로 완성된다. 이런 스토리텔링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천재의 탄생을 추앙하며 무의식적으로 새로운 멸망을 고대한다. 끝이라는 시작, 시작이라는 끝, 기존 질서와 기대를 무너뜨리는 새로운 시대는 모두 시한부의 운명을 지닌다. 관심에서 멀어지든 창조자가 사망하든. 브랜드, 사람, 산업, 꼭대기까지 치달은 모든 것들은 끝과 어둠을 맞이한다.


리 알렉산더 맥퀸은 실업급여로 패션일을 시작했다. 무모했고 건방졌으며 거침없었다. 그의 무시무시한 능력은 곧 발각되었다. 전 보그 영국 편집장 이사벨라는 맥퀸의 평생 친구이자 조력자가 되었다. 맥퀸은 지원과 자본을 등에 업고 개인 맥퀸에서 세계에서 가장 독보적인 브랜드이자 디자이너 맥퀸으로 진화한다. 할머니 옷 같다며 폄하했던 지방시를 바꿔놓았고, 이후 LVMH와 같이 일하게 된다. 영국과 미국을 오가며 그는 수십 개의 쇼를 준비했고 화려한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 그 불길 속에서 맥퀸은 스스로 타들어간다. 맥퀸의 시작부터 절정까지 모든 순간 성취와 감정을 함께 나눴던 평생의 조력자 이사벨라 사망 후 맥퀸은 무너진다. 투병 중이던 이사벨라는 마지막 인사를 위해 화려한 자릴 마련했지만 계획하고 기대한 만큼 매듭은 아름답지 않았다. 모든 죽음이 그렇듯 이사벨라의 죽음은 맥퀸에게는 충격을 넘어선 생애 일부의 소멸과 같았고 진짜 인사를 하기 위해 쇼를 준비한다. 맥퀸이 알고 있는 이사벨라의 전부와 그 이상이 녹아있었다. '삶의 모든 게 고통의 감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누군가는 잠시 쉬라고 조언했지만 쉴 수 없었다. '패션이 삶의 전부는 아닌데 일에만 갇혀 있기 싫은데, 그는 50명 직원의 생을 책임지고' 있었다. 패션 시스템 전체가 자길 적대하는 기분에 휩싸이기도 했다. 맥퀸은 자신에게 닥친 고난과 압박 외로움을 스스로 끝내려 했다. 어머니의 사망은 맥퀸의 마지막 사건이었다. 어머니를 위한 천사가 안고 드높이고 있는 묘비의 디자인을 제안하고, 어머니 장례 전날 맥퀸은 자살한다. 다큐멘터리의 많은 장면이 그의 가족과 동료들의 증언으로 채워졌다.


스스로의 죽음을 예고하고 실행하는 사이에 어떤 생각과 선택 결정들이 오갔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모든 산업들은 그들의 보이지 않는 죽음을 먹으며 성장하고 패션이 다른 점이라면 그 결과물들이 어떤 산업군보다 화려하다는 점이다. 맥퀸은 그 거대하고 찬란한 시장에서 빠른 시간 동안 가시적인 성과와 성장을 이뤘다. 그가 태어나고 성장한 국가들의 근처에 가보지 않은 자들에게도 그의 브랜드와 이름을 알리며 추종하게 만들었으니까. 세상이 부여한 관심과 영향력의 크기가 일정 수준을 넘어섰을 때 자아가 비대해졌을 때, 초라한 시절 함께했던 주변인들은 되려 작아진다. 나는 점점 커지고 너희는 고맙긴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게 된다. 비대한 자아를 잃기 싫어서 많은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다. 1년을 반으로 나눠 다른 국가에서 활동하고 수십 명을 이끌며 옷을 디자인하고 만들고 쇼를 준비하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다음 쇼를 준비하고 다음 쇼를 준비하고 다음 쇼를 준비한다. 인간은 사라지고 브랜드의 존속 여부가 더 중요해진다. 사람들이 쇼장 위에서 체온을 느낄까. 한번 충격받은 사람들은 더 큰 자극을 원한다. 더 놀라고 더 불쾌하고 더 증오하게 되길 원한다. 맥퀸은 장기를 꺼내 널어놓듯 심연의 어둠을 떠내 런웨이 위해 도색한다. 스스로가 선택한 세계에 만인을 초대한다. 새로운 감정을 주입한다. 반복한다. 끝에 다다른다. 맥퀸은 더 이상 충격과 공포를 반복하지 않아도 된다. 그의 죽음과 함께 알렉산더 맥퀸의 쇼는 끝났다. 브랜드는 남았지만 브랜드만 남았을 뿐이다. 많은 사람들은 패션 브랜드 알렉산더 맥퀸은 알아도 디자이너 알렉산더 맥퀸의 생사는 묻지 않을 테니까. 맥퀸은 죽어서 맥퀸을 남겼다.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천재 맥퀸은 브랜드로 남아 영원히 박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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