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트 라이언즈, 사자들의 죽음

로버트 레드포드 감독. 로스트 라이언즈

by 백승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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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들이 이끄는 사자의 무리들은 차가운 눈밭에서 죽음을 맞는다. 뜨거웠던 피들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검게 흩뿌려진다.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것들에 대한 강한 주장, 움직임. 정치인은 말로, 언론인은 펜으로, 군인은 총으로 맞서지만 입은 실수하고, 글은 선동하며, 총알은 바닥난다. 미국은 잘못을 알면서도 굽히지 않는다. 마치 잘못도 용서도 자신들만의 몫이라는 듯 그들의 날 선 판단은 녹슬 줄 모른다. 불의와 맞서기 위해서는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될 준비가 되었다며 강한 어조로 주장한다. 어떤 희생, 사자들은 앞으로 얼마나 더 길을 잃어야 할까?


기존의 세계가 다른 세계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과정에는 적응과 갈등이라는 단계를 거친다. 적응, 닮아가거나 표면적으로나마 비슷해진다는 의미, 개인과 개인 간에 이러한 부분은 늘 이야깃거리가 된다. 누구나 사회라는 시스템 안에서 속해있어야 하고 거부한다면 수많은 불이익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유를 누릴지언정 보호받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라는 울타리 안에 속한 이들은 적응을 위해 자신의 일부분을 사회화시킨다. 질서를 지키고 예절을 갖춘다. 갈등은 빈번하고 고민은 끊임없지만 드러내지 않는다. 그렇게 개인 간의 관계는 원만해지고 수많은 경우의 수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존속된다. 시간의 흐름에 발맞춰 낮은 숨을 고르는 법을 익힌다.


국가와 국가의 경우, 개개인들 간의 그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파급효과가 예상되기 때문에 더욱 철저한 질서 확립과 친밀감 호소로 평화를 유도한다. 부루마블을 떠올려보자. 말이 보드판을 돌면서 갖고 있는 현금을 통해 나라를 사고 건물을 짓는다. 우주여행도 한다. 하지만 점점 주사위라는 변수에 좌우되면서 빈과 부로 갈리게 된다. 빼앗고 빼앗기는 일이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되고 어떡해서든 더 많은 파이를 차지하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모든 국가와 건물을 잃고 파산하는 쪽이 생기고 그만큼의 부를 보유한 쪽이 생긴다. 게임은 거기에서 끝난다. 하지만 실제 국제관계는 격이 다르다. 주사위가 아닌 판을 뒤집을 수 있는 변수는 얼마든지 존재한다. 제어와 감시가 끊이지 않고 위장과 첩보가 난무한다. 정치가가 주사위를 굴린다. 그의 결정에 따라 말의 운명이 달리한다. 말은 그 나라의 국민과 군대이다. 군대는 움직이고 국민은 동요한다. 작전이 성공하면 전체적인 파이는 커지지만 실제로 혜택을 입는 건 주사위를 굴리는 정치가의 입지일 뿐, 군대는 다시 다른 파이를 키우기 위해 움직이고 국민들의 감정은 주사위의 움직임에 따라 요동친다. 언론이 흥을 돋운다. 전쟁을 게임처럼 보도하고 군중을 선동한다. 축구게임을 보듯 화면 속의 전쟁을 즐기던 국민들은 승리에 환호한다. 마치 내기에서라도 이긴 듯, 하지만 돈을 딴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남은 건 전쟁에서 돌아오지 못한 아들과 이유를 알지 못한 채 포화 속에서 잿더미로 변한 어느 변방 국민의 시체들뿐이다.


모두가 잘못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주사위를 굴리는 사람도, 말을 옮기는 사람도, 총부리를 겨누는 사람도. 하지만 훗날엔 결국 그땐 어쩔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상황이 그랬다며,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며, 살기 위해서 그랬다며. 완전한 세계는 있을 수도 없고 있지도 않았다. 그렇게 미국은 거짓말로 파이를 키우고 자국민들은 늘 불안해하며 젊은이들은 피를 흘린다. 이중에도 예외는 있다. 출신이 좋고 부유한 이들에게 이러한 부조리는 그저 뉴스의 헤드라인일 뿐이다. 단정 짓기 어렵다기에는 그들이 피할 수 있는 것은 너무도 많다. 군인이 되어 전방에 서지 않아도 되고, 세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전쟁과 평화는 아무래도 좋다. 주식이 오른다면 뭐든 환영이다. 세상은 불공평하다. 문명의 발달과 지적 수준의 상향평준화조차 이러한 서열을 막지 못한다. 변화는 너무 더뎌 눈에 띄지 않고, 과거의 오류는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여전히 반복될 것이다.


구원의 길이 있을까? 영화는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더 많은 ‘참여’라고 주장한다. 미국이 스스로를 구원하려는 노력은 늘 세계를 지옥으로 만들어버리는 결과를 종종 초래했지만 영화는 그래도 다수의 적극적인 참여가 다민족의 더 나은 삶과 공존을 위한 방법이라고 외친다. 그리고 그 등장인물의 마지막 모습은 그의 주장을 묵살하듯 매우 현실적이었다.


승자가 되기 위함이 아닌 생존을 위해 정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함을 깨닫는다. 정치인이 아닌 정치, 세상은 결국 망치를 든 이에 의해 돌아감을 실감한다. 무력함을 서둘러 인정하고 손을 놓아버리는 것은 자신은 물론 다른 모든 이들의 기회마저 빼앗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여겨졌다. 주어진 삶만 열심히 산다고 해서 제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 제대로 살기 위한 과정은 알아야 할 것과 겪어야 할 몫이 너무 많지만 그 시도만을 통해서도 가치는 입증될 것이다. 세상은 참여하는 이과 행동하는 이들의 것이어야 한다. 더 이상 사자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양들의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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