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은 자동차 광고

데이즈드. 2010년 12월

by 백승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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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ST & CREATIVE

탈것은 지천, 선택은 보류. 마음을 못 정한 건
지갑 사정 때문만은 아니다. 길을 잃은 자동차 광고에 대하여.


가히 배스킨라빈스 31이 부럽지 않다. 태초 이래 대한민국 땅에서 네 바퀴 달린 탈것을 고르는데 이토록 선택의 폭이 넓었던 적이 있었을까? 삼성동 코엑스, 강남역 주변, 명동과 여의도의 대형 쇼핑몰 등 인파가 몰리는 곳들은 신차 론칭 행사와 경품 프로모션으로 항상 시끌벅적하다.
수입차 시장 개방이 바꿔놓은 변화다. 범죄 욕구까지 불러일으키는 디자인, 검증받은 안전성과 성능은 물론, 합리적인 가격으로 국내 시장 점유율이 달력 넘어가기 바쁘게 상승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누구도 수입차 소유 여부로 애국심을 거론하지 않는다. 회장님의 값비싼 애마에서 라이프 스타일의 표현방식 중 하나로 공감대 형성이 빠르게 이뤄지는 중이다.
이로 인해 자동차 광고시장은 전례 없는 긴장감을 형성하고 있다. 수입차의 파이 경쟁과 이에 대응하기 위한 국산 브랜드들 간의 분투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 잘 나간다는 자동차 이름은 들어봤어도 끝내준다는 자동차 광고는 기억에서 아련하다. 1986년 아우디가 눈 덮인 스키점프대를 타고 오르며 경악을 금치 못하게 했던 TV광고가 나간 지 24년이 지난 지금, 자동차 광고들이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1991년, 대우 중형 세단 에스페로는 탐 크루즈의 영화 ‘TOP GUN’ 주제가 ‘Take my breath away` 와 함께 F-14 전투기를 광고에 등장시킴으로써 이목을 집중시키는 데 성공했다. 카피는 地上飛行(지상비행). 활주로를 박차고 날아올라 공중을 누비는 전투기와 도로를 질주하는 에스페로가 어우러져 스케일은 물론 스타일까지 사로잡았던 광고로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공교롭게도 같은 해, 현대 엘란트라는 독일의 속도 무제한 고속도로에서 촬영한 TV광고 한편으로 대한민국에 아우토반이라는 이름을 각인시킨다. 콘셉트는 독일 스포츠카의 자존심 포르셰와의 한판 승부. 강렬한 엔진 사운드와 화면을 가로지르는 추격전을 통해 강력한 주행성능을 확실하게 어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촬영기법과 CG 수준은 높아졌지만, 자동차 광고는 새로운 고민에 빠진다. 남성 운전자의 질주본능 외에 고학력, 고임금 여성 경제인구와 싱글족의 가시적인 증가, 주 5일제로 인한 여가시간 확대, 가족을 향한 배려와 개인의 취향 모두를 욕심 내는 운전자들의 등장 등, 타깃 세분화와 수입차 시장 개방을 통해 경쟁구도가 더욱 치열해진 것이다. 여기에 치솟는 유류비와 지하철 노선 확장 등 대중교통수단의 개선까지, 시장의 변화와 한정된 마케팅 비용 안에서 자동차 광고가 고려해야 할 것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온 카드는 결국 합리적 소비욕구를 자극하는 것. 우리 차는 기름은 적게 먹는 데 힘은 세며, 예쁘기까지 한데 세계 안전테스트에서 별을 많이 받았다는 등 역동적인 질주 장면에 사용설명서와 성적표를 붙인 단기 판매 증진을 위한 광고들이 속출한다. 드라마를 기다리던 소비자들은 언젠가부터 ‘선전’ 같은 광고를 보며 이성만 자극하는 스타일에 채널을 돌렸고, 브랜드는 알지만 광고는 갸우뚱한 망각의 시대에 접어든다.
광고 제작자로서, 또한 첫차를 구매하기 적정한 시기에 이른 잠재적 타깃으로서 빈칸 채워 넣기 같은 일부 광고들을 볼 때마다 -사정 알면서도- 아쉬움이 앞선다. 광고를 만든 이들은 모험을 꿈꿨음에도 불구하고, 거대 자본이 투입되기에 ‘보다 안전한’ 결정에 수긍해야 했을 것이다. 가족과 친구와의 약속들을 등진 채 수많은 경쟁요소들 사이에서 군계일학이 되기 위해 들였던 고민과 밤샘의 시간은 과거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았을 것이다.
현실의 중력을 넘어 판타지로 가득 찬 자동차 광고를 소망해본다. 눈에 보이는 모든 우주가 광고의 영역이 되어가고 각 브랜드에게 허용된 시간은 더욱 짧아지고 있다. 과거의 경험들이 남긴 교훈과 패턴으로 미래의 구매를 유도하기엔 이성적 소구의 파급력은 많이 약해졌다. 굳이 현재의 소비자가 원하는 것들에 과도한 포커스를 맞출 필요는 없다. 19세기 말, 말을 대체하며 세상을 놀라게 했던 순간부터, 자동차는 필요가 아닌 동경의 대상이었으니까. 빅브라더를 향해 거대한 해머를 내던졌던 1984년 애플 광고처럼 지금 국내 자동차 광고에는 꿈 많은 어른들을 위한 테러리스트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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