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카지노 로얄, 비밀과 비극

마틴 캠벨 감독. 007 카지노 로얄

by 백승권

사연이 많은 사람들은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굳게 다문 입술과 차가운 눈빛으로 위장한다. 그 사연이 그들이 프로가 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상처는 침묵이 되고 과거는 누가 묻지 않아도 감춰야 할 비밀이 된다. 하나를 감추면 다른 하나는 또렷이 부각된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들은 그렇게 냉정을 미덕으로, 더 묻지 않는 것을 에티켓으로 인식한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 아무 소용 없어진다는 걸 그들은 몰랐을까? 비밀과 비극 중 무엇이 더 중요한 지 그들의 교본엔 쓰여 있지 않았던 것일까?


남자(다니엘 크레이그)와 여자(에바 그린)는 험난한 과정을 같이 겪으며 사랑에 빠진다. 마치 공식과도 같은 것, 같이 있으며 나눈 것은 정보를 넘어선 감정이었고, 손에 피 묻히는 일이 천직이라 여겼던 남자에게 미래를 다시 생각할 기회를 준다. 여자는 아름다웠지만 과거는 목걸이처럼 남아있었고 남자는 끝내 묻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살아있는 것이었고 둘이 같이 행복할 수 있다면 어떤 것도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 여겼다. 감정과 이성을 제어하는 능력에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그는 의심하는 본능을 지녔음에도 사람에 대한 믿음을 지니게 되고, 그것이 자신의 판단을 얼마나 흐리게 만들었는지 뒤늦게 깨닫는다.


여자의 거래는 자신의 과거를 지우고, 지금의 그에게 헌신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사랑을 잃지 않으려면 돈이 필요했고, 정의보다 중요한 것은 분명 존재하고 있었다. 위험한 거래가 성립되던 날, 여자는 물속으로 가라앉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남자와 사별한다. 물속에서 남자를 바라보는 여자의 마지막 표정엔 미안함과 슬픔이 혼재해 있었다. 남자는 몰랐고 여자는 말할 수 없었던 사연. 남자는 그녀를 안고 소리 없이 울었다.


문제와 답이 끊임없이 순환하며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세상, 냉철한 이성의 소유만으로 일이 해결된다면 인간은 머지않아 기능이 다한 뇌를 갈아치우는 기술을 상용화할 것이다. 그의 직업은 개인적인 행복마저 업무라는 테두리 안에 가둬놓았다. 시스템의 이성적인 유지를 위해 가장 비이성적인 해결방법을 고수하는 그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은 바이러스 파일과 다르지 않았다. 지우지 않는다면 전체가 지워질지도 모를 운명 앞에서 바이러스는 스스로 소멸하는 길을 택했다. 이제 항체는 두 번의 실수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남자는 두 번 다시 사랑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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