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스콧 감독. 데자뷰
현재의 사람들은 위로를 받기 위해 ‘어쩌면 행복해질지도 모르는’ 내년보다 ‘정말 행복을 만끽했던’ 어제저녁의 추억에 기댄다. 힘들어질 때마다 미래지향적 사고보다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되는 건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게 겪어본 적 없는 미래의 어느 날이 아닌 이미 느껴보고, 그래서 다시 그렇게 되고 싶은 찰나의 과거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쁜 일보다 좋은 일을 더 기억하게 만드는 망각이라는 시스템 덕분에 좀 더 긍정적이고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고 있지만 지난 나쁜 일이 나뿐이 아닌 주변 많은 이들에게 깊이 각인되어 씁쓸함을 토로하게 되는 일이 잦아진다면 이미 엎질러진 물이 증발하길 기다리기보다는 차라리 그때 컵이 쓰러지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과거 시제로 돌아가길 바라는 것이다.
토니 스콧 감독과 덴젤 워싱턴이 만난 데자뷰는 그런 생각을 가지게 한다. 9.11 테러가 정말 많은 것을 변화시켰노라고. 그날 이전으로 되돌리고 싶은 간절함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듯했다. 한 도시 전체를 단숨에 정전상태로 만들어 버릴 만큼의 전력을 사용해서라도, 고도의 물리학 이론을 이용한 타임머신 같은 기술을 무모하게 써서라도 되돌리고 싶은 것이다. 그날, 테러가 일어나기 이전으로 말이다. 부부와 아이들, 긴 기다림 끝의 해후로 어쩔 줄 모르는 기쁨에 취해있던 540여 명이 폭발음과 동시에 순식간에 목숨을 잃는 일이 발생한다. 진주만에서 일본군이 쉬고 있던 미군에게 쏟아부었던 것처럼 배는 화마에 휩싸이고 사람들은 불길에 비명소리도 묻힌 채 수장되거나 사라진다. 자식을 애타게 찾는 노부부가 보이고 경악을 금치 못한 사람들의 공포와 두려움의 시선이 엇갈린다. 많이 본 장면. 지금 CNN을 틀어도 이러한 모습은 광고보다 많이 볼 수 있다.
9.11이 터졌을 때가 생각난다. 도심상공에 비행기가 날아오고 고층 빌딩에 꽂힌다.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고 빌딩은 무너지며 도시는 마비되었던 그때, 아르바이트 마무리 작업을 하다가 시선이 고정되었던 TV에서는 익숙한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할리우드가 내세우는 자본과 기술이 만난 액션 영화의 하이라이트가 연상될 정도로. 아무도 믿지 않았지만 테러는 생중계되고 있었고 필자를 포함한 지구인들은 눈을 의심했다. 극장과 비디오로만 봤던 저게 진짜라니. 결과적으로 자국인 수천의 목숨을 잃은 미국은 용의자로 지목한 나라의 수십 수백만의 생계를 위협하게 된다. 하지만 보복이 거세지고 지금껏 악순환이 이어온다고 해도 결국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남은 자들에게 다시 일어설 용기를 줄지언정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돌아오지 않고 앞으로도 상실의 아픔은 희석될지언정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데자뷰는 현실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범인의 동기부여보다는 사건의 사전방지,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그처럼 그때 그곳으로 넘어간다. 어느새 익숙해져 연민의 감정을 느끼게 된 여인과 죄 없이 숨진 수많은 가족들을 구하기 위해. 그가 자기 목숨을 버려가면서까지 영웅이 될 수밖에 없는 선택을 하게 되었던 건 애초부터 삶에 미련을 둘 대상이 다 떠나 버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액션과 SF를 섞은 긴장된 전개의 중심에는 물리학이 있었다. 철저한 이성적 사고를 통해 감성적인 결과를 도출해내는 그들의 이론은 저게 9.11이 일어났을 때에도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간절함과 함께 아무리 어려운 해설이라도 믿고 싶게 만든다. 하지만 영화는 늘 현실 다음에 나오고 안타까운 어제를 반추하게 만들 뿐이다. 나비효과의 디렉터스 컷에서 주인공은 불행의 근본을 없애려던 끝에 자신의 존재마저 지워버리는 극단의 선택을 한다. 현실도 마찬가지, 어제로 자꾸 돌아가는 시도는 결국 존재 자체에 대해 의심하고 부정하게 되는 결과를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
슬픈 일은 수습이 어떻게 되건 슬프지만 남은 이들에게 삶은 계속된다. 때로는 돌아가고 싶은 희망보다는 인정하고 마는 용기가 더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다. 운명을 믿지만 운명은 결국 예정론보다는 결과에 의해 말해지는 것이니까. 모든 이가 바라는 어제를 닮은 미래는 데자뷰에 그칠 뿐, 모든 것을 치유하기엔 우린 너무 많이 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