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 사랑을 포기할 때

변승욱 감독.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

by 백승권

굳이 나이를 밝히지 않아도 나보다 더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굳이 민증을 꺼내지 않아도 여러 굴곡이 보이는 그들의 표정, 그 지친 얼굴들. 주름의 수를 세지 않아도 한숨이 몰아치고 있었다. 알려주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지만 결국 그들의 속사정은 집안 사정이다.


엄마와 딸 둘. 떠난 아비가 남긴 5억의 빚은 짐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가벼운 어투로 들릴 정도다. 심신의 안정이 필요하다는 엄마(김성녀)는 하루 일곱 시간씩 요가와 명상수련을 하고 집안 사정을 뻔히 아는 동생은 뱃속에 애가 있으니 결혼을 해야겠단다. 여자(김지수)는 동대문에서 명품 디자인을 카피해서 몰래 팔아 돈을 번다. 그걸로 이자를 갚고 종종 형사들과 대면한다.

엄마와 아들 둘. 마흔이 넘어 보이는 형은 말을 잘 못한다. 행동도 종잡을 수 없다. 형(이한위)이 좋아하는 것은 대학가요제 그룹사운드 ‘활주로’다. 박카스를 좋아하고 잡지에서 속옷광고를 몰래 찢어 방에서 혼자 보는 것을 좋아한다. 엄마(정혜선)는 그를 감싸고 남자(한석규)는 그런 엄마가 종종 화가 난다. 그도 형을 아끼지만 형 때문에 결혼 직전까지 갔다가 엎어지고 그는 아직 형 뒷바라지 때문에 연애할 여건도 연애할 맘도 생기지 않는다. 몸이 불편한 핏줄을 돌보는 게 가족의 의무지만 그 의무를 다하는 만큼 자기 자신에게는 여러 희생과 포기를 강요해야만 했다.

둘의 만남은 무미하다 못해 건조하다. 술에 취할 수밖에 없는 여자와 늦은 시간 술 깨는 약을 건네는 약사. 마주치다 보니 인연인 것 같고 얘기하다 보니 사랑인 것 같다. 그리고 허름한 모텔에서 맞는 어둑한 새벽은 잠시 잊었구나 할 만큼 궁색한 변명을 대신해주기 알맞다. 번쩍이는 눈 맞음도 애틋한 표정도 다 해보고 싶었다. 기다려도 보고 여행도 가고 텐트 속에서 밤도 지새 보고 기분 좋고 편한 웃음으로 서로를 대하고. 하지만, 사는 건 편집이 안된다. 예상하고 일이 터지는 것도 아니고 그때그때 얼굴 붉히지 않아가며 대처하기도 힘들다.

여러 사람 상대하며 살다 보니 구차한 설명보다 윽박을 지르는 게 해결이 빠른 듯했다. 상처 줄 걸 알면서도 그렇게 되고 상처받을 것을 알면서도 더는 묻지 않는다. 나이가 들면 그런 관계가 익숙해지나 보다. 그때그때 감정을 드러내는 게 나중에 원망하는 것보다 낫다고 여겨지나 보다. 잘못인 줄 알면서도 잘못하고 그걸 알면서도 이해해주기보다 그냥 넘어가는 게 사랑법인가보다. 힘들다.

좋은 날들이 불안한 것은 힘든 날이 언젠간 닥칠 거라는 학습된 본능 때문일 것이다. 악재는 겹치고 당연히 감내해야 할 과정들이 버겁다. 힘에 부친다. 연애는 다 알듯이 나이가 찬 남녀가 둘이 좋아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결혼은 하고 싶지만 서로의 생활을 부둥키게 하자니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답이 나온다. 이런 건 길게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게 되고 실제로도 그렇다. 비슷한 표정의 사람들은 언어로 소통하지 않는다. 그들에겐 침묵과 작은 떨림 하나가 모든 감정을 대신한다. 말 못해서 슬프고 다 알아서 아프다.

한석규와 김지수의 표정은 한 장면 한 장면이 모두 말을 한다. 술을 죽도록 먹거나 펑펑 우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아도 그들의 그늘이 얼마나 깊은 지 알게 해준다. 인생 다 그렇지 라고 내뱉으며 공감하는 척할 수 없었던 건 정말 공감한다면 그렇게 말해선 안되기 때문이었다. 제목답지 않게 그들은 누구나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을 제대로 말하지 못한다. 사랑만 할 수 있게 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빚에 쫓겨 핏줄에 부대껴 겨우겨우 웃음 없이 저녁을 맞는 그들에게 연애는 결혼은 사랑만 가지고선 어림없는 일이다. 보는 내내 여자 정혜의 나중 모습 같았던 영화가 남긴 것은 한숨뿐이다. 사랑하지 못해도 살아야 함이 안타까워서.





연애의 허상 - 영화와 사랑에 대한 비밀과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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