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탄생, 늘 겨울

김태용 감독. 가족의 탄생

by 백승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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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다. 아무리 두툼히 입어도 손이 시리고 목 안쪽으로 한 가닥 바람이라도 들어올라 치면 어깨가 한껏 좁아지며 몸서리쳐지는 그런 시즌이 어김없이 오고 말았다. 거리엔 두꺼운 옷을 몇 겹이나 걸친 사람들이 바람에 밀려 걸음을 서두르고 상점의 불빛들은 더욱 환해지며 음악소리는 전과 다르게 더욱 크게 들린다. 이맘때의 따뜻했던 시간들과 오래전 좋은 사람들을 그리워하게 만든다. 눈물이 어릴 정도로 보고 싶게 한다. 체온들과 서로를 향했던 환한 표정들을. 발길은 굳이 고민하지 않아도 집을 향한다. 삐걱거리는 대문을 지나 덜컥거리는 문고리를 돌리면 성냥팔이의 성냥이 꺼지고 만다. 차가운 방과 벗겨진 벽지가 눈에 들어온다. 동화는 불쌍한 소녀의 행복한 죽음으로 끝이 나지만 여긴 다르다. 잠은 오지 않고 머리 속은 자욱한 연기로 가득 찬다. 여기는 집, 핏줄이라는 반강제적인 명목 아래 모인 사람들과 어쩔 수 없이 붙어사는 곳이다.


연락 한 번 없이 5년이 지난 남동생이 멋쩍은 웃음으로 돌아올 수 있는 곳이다. 같이 온 여자의 나이가 누나보다 열 살은 더 많아 보여도 뭐 그냥 넘어갈 수 있는 곳이다. 그 여자가 전 남편의 전 부인과 낳은 애를 데리고 있어도 같이 있다 보면 정들 수도 있는 곳이다. 그러다가 과자 사러 다시 나간 동생이 안 들어와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할 수 있는 곳이다.


아빠, 아니 엄마의 남편이, 아니 엄마의 남자 친구가 여러 번 바뀔 수도 있는 곳이다. 엄마가 애지중지하는 다섯 살배기 꼬맹이가 친동생이 아닐 수도 있는 곳이다. 늘 내게 무관심했던 엄마라는 병에 걸린 몸으로 꼬맹이의 숙제를 하고 꼬맹이의 아빠라는 남자는 가끔씩 찾아와 갓 만난 10대 애들처럼 얼굴을 어루만지는 곳이다. 갖은 아양과 수모를 참아가며 얻은 직장을 첫 출근도 하기 전에 맥없이 그만두게도 만드는 곳이다. 내 성질을 이기지 못한 남자 친구 따위는 그게 어떤 이유이든 잊을 수 있게 하는 곳이다.


서로 다른 곳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과 서로 다른 가족이라는 극단적인 현실의 모순을 보며 자란 아이들은 판단과 선택을 해야 할 성인이 될 나이에 가까워진다. 여러 사람과 만나고 그중에 자신과 닮은 유전자를 본능적으로 발견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건다. 사랑을 주고만 싶어 하는 여자아이와 사랑을 받고만 싶어 하는 남자아이는 우연처럼 만나 필연 같은 고비를 겪는다. 어떤 여자도 자기가 헤프다고 생각하지 않고 어떤 남자도 자기가 옹졸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둘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런 자신들을 마주 보며 화를 낸다.


태생적인 불안함과 이해할 수 없는 이기심을 바탕으로 가족은 그 화해조차 완전한 치유를 얻지 못한다. 몰락한 가족들 사이에서 탄생한 희망을 영화는 묵직하게 풀어놓는다. 불안정하고 불편하며 기가 차고 욕이 나온다. 벗어나려 악을 써봐도 허탈감만 더해지고 잊으려 울음을 터뜨려도 곁엔 아무도 없다. 자신의 존재감은 점점 희미해지고 손을 뻗어도 잡히지 않으며 점점 멀어지고 차가워지다가 어쩌다 불현듯 보고 싶을 때쯤이면 말 한마디 없이 자취를 감추고 그렇게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아무리 늘어놓아도 가족에 대한 모멸찬 태도는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부자와 대가족을 그린 완벽한 구조의 드라마를 비웃기나 하듯 감독의 시선은 서슬이 퍼렇다 못해 날이 무뎌질 때까지 베일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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