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니, 그를 보고 있다

정지우 감독. 사랑니

by 백승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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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가 있다. 다른 사람들의 소란스러움은 아랑곳하지 않고 온통 한 곳에만 신경이 쏠릴 때가 있다. 시선이 고정되고 신체 곳곳의 움직임을 제어하는 머릿속이 온통 한 사람의 이미지로만 가득 찰 때가 있다.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 어떤 표정을 짓든 재미있고 즐거울 때가 있다. 휴대폰이 멀리 있어도 시간은 궁금하지 않고 벨소리가 오랫동안 울리지 않아도 초조하지 않다. 그의 다음 행동이 계속 궁금하고 그가 즐겨 듣는 옛날 노래의 유치한 가사라도 같이 꽃을 수 있는 이어폰이라면 염치를 잊고 더할 나위 없는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음을 맞춰가며 부를 수도 있다. 그와 마주할 수 있다면 그의 품에서 같이할 수 있다면 새벽에 정신없이 뛰어가는 것도 수많은 눈과 말들이 오가는 직장 안에서의 불편한 수면도 감내할 수 있다. 그가 좋아한다면 뭐든지 맞출 수 있고 그가 슬프다면 어떤 사연이든 마음이 아프다. 내가 아닌 다른 누가 그를 좋아한다면 화가 날 것이다. 그 또한 내가 모르던 다른 누구에게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는 것을 안다면 아주 많이 화가 날 것이다. 그의 세세한 관계의 비하인드 스토리와 사연은 중요하지 않다. 단지 그와 내가 모르는 그녀가 가깝다는 추정 하나만으로도 얼굴은 달아오르고 충분히 흥분될 수 있다. 가슴이 아프고 술을 가까이하고 싶고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고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괴롭지만 그래도, 그래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그건 과거로 치부되면 그만이니까. 중요한 것은 그가 지금 내 곁을 떠나지 않는 다는 것이니까. 그가 여전히 내 곁에 있을 것이고, 스치듯 말한 사소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밤새 홀로 기다려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나는 발 벗고 뛰어서 그를 와락 안아줄 수 있는 것이다. 그가 깊이 각인된 추억의 이미지와 동일하게 느껴지는 사람이라는 것은 그를 눈여겨보게 되고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지만 그게 실은 아니더라도 이젠 중요치 않다. 기억은 진실이 아닌 해석에 따라 달라질 수 있었나 보다. 지금의 그와 과거의 그를 비교해 보는 과정은 결국 뒤꿈치를 까지게 한 굽 높은 새 구두를 벗음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예전의 그는 더 이상 중요치 않다. 과거와 닮았던 그렇지 않던 지금의 그는 나의 현재를 총체적으로 뒤흔들 수 있는 위험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걷잡을 수 없게 한다. 그가 좋으니까. 그를 사랑하니까. 어떤 친구(김영재)와 어떤 첫사랑(김준성)과 어떤 소녀(정유미)가 나를 갈등하게 하더라도 그것은 더 이상 벽이 될 수 없다. 난 사랑에 빠져있고 더 빠질 준비만 되어있지 거기서 억지로 늪에 걸리고 헤어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언제까지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으며 수많은 편견과 세상의 가시덤불 같은 시선들이 가슴과 머릴 아프게 하더라도 참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나를 바라보는 표정이 나를 떨리게 한다. 내가 그를 바라볼 때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사랑한다. 좋아서 미치겠다. 가시방석 같은 직장에서의 눈총이라도 친구의 넋두리 같은 충고라도 미안하지만 아무렇지도 않다. 내 통증은 간헐적으로 내 입 속에 퍼져 소리를 터뜨리지만 웃을 수 있다. 행복하니까. 사랑하니까. 아무리 아파도 지금의 이 감정을 멈추게 할 수는 없으니까. 이미 통제불능의 지경에 이르렀으니까. 나를 마음에 두고 있는 친구와 마주하고 있고 내가 마음에 두었던 예전의 사랑과 마주하고 있어도 중요하지 않다. 나를 가까이 두고도 우두커니 어색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저 소년이 내 사람 내 사랑인 것이다. 과거의 그는 죽었지만 내 안에 살아있다. 난 아마도 현재의 그 안에서 예전의 그를 보며 사랑에 빠진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살아있다. 지금의 그 안에서, 그 안에서 다시 태어나서 나와 사랑하고 있다. 현재의 그를 사랑한다. 그 안에 살아있는 첫사랑을 사랑한다. 아무 말도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그를 보고 있다. 그(이태성)가 모든 것이고 나(김정은)의 모든 것을 대신할 수 있다. 나이는 더 중요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 그깟, 그깟 열세 살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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