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 슈슈의 모든 것, 잔혹동화

이와이 슈운지 감독. 릴리 슈슈의 모든 것

by 백승권




아름답다기엔 너무 잔인한 영화가 있고

잔인하다기엔 너무 슬픈 영화가 있으며

슬프다기엔 너무 아름다운 영화가 있다



갓 중학교를 입학한 소년과 소녀들이었다. 어리지 않았다. 과거를 곧잘 잊곤 하는 어른들의 눈엔 그저 작은 체구의 아직 생각마저 덜 자란 풋내기로 보였겠지만 이와이 슌지 감독이 보여주는 캠코더로 찍은 듯 다큐멘터리 같은 영상들은 -진실을 오히려 온통 파스텔톤으로 물들였음에도 불구하고, 눈을 감아도 귀를 물 들일만큼 아름다운 음악들로 가득 채웠음에도 불구하고- 잔인했다. 눈물과 웃음과 피와 햇살이 뒤범벅되어 있었다.


교복을 입고 있어도 그들의 면죄부는 생각나지 않았고 아무리 예쁜 표정을 지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어도 눈물은 감춰지지 않았다. 과장도 허구도 남아있지 않았다. 영혼을 사로잡을 듯한 고운 선율은 물과 기름처럼 달리 들렸다. 그들은 노래하면서도 자신을 구제하지 못했고 하늘을 제대로 나는 법을 알기도 전에 추락하는 죽음을 겪어야 했다. 폭력과 집단 괴롭힘은 가하는 이들에겐 아무렇지도 않은 일, 당하는 이들에겐 복수를 품게 하는 악순환의 씨앗이었다.


무엇인가를 잘한다는 것은 표적이 되었고 집단에 순응하지 못한다면 끔찍한 형벌을 받아야 했다. 판단의 기준은 어디에도 없고 남은 건 갈가리 찢긴 옷들과 흉측하게 삭발한 여자아이의 머리뿐. 마음은 잿더미에 묻혀 영영 감춰졌다.


누구 편에도 서지 못하고 그저 보기만 하는데도 미어졌다. 옳고 그름을 가늠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판단한다 해서 구제할 수 없으니까. 저들에게 어른의 존재는 무의미하다. 온통 말없는 하늘과 빨려 들어가고픈 시디플레이어 속의 음악소리뿐. 그것 또한 그들을 변화시켜 주지 못하긴 마찬가지지만.


음악이 조금이나마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고 그들에게도 마찬가지이길 바랬다. 제발 그래 주길. 특정 선율을 좋아하는 것은 특정 사람들의 특권이 아니다. 누구나 좋아할 수 있다. 그 '누구'와 함께 그 음악을 좋아하는 일을 당신이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소년은 그를 죽였다. 참을 수 없는 일. 소년이 예상했던 그와 현실의 그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는 그가 아니어야만 했었다. 이제 막 교복을 입은 그들은 갈라지고 갈라져서 심지어는 스스로의 마음까지 갈라놓는다. 혼자가 되고 떼거리가 되어 협박하고 원조교제를 강요하고 돈을 뜯어내고 구정물에서 개처럼 구르게 하고 의자로 내려치고 어둠 속에서 스스로 바지를 벗게 하며 절도를 저지르고 저항하고 창고에 몰아넣고 집단성폭행을 한다.


그런 그들이 한자리에서 만들어내는 화음은 처연할 정도로 귀를 울린다. 지워질 수 없는 그림자는 여전한 상처로 드리우지만, 그렇게 지난다. 10대, 슬프고 잔혹한 날들. 공존하더라도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게 하며 고민을 넌지시 말할지언정 해결할 수 있는 대책은 어디에도 없는 처절한 침묵의 시간들. 결국 자신은 사랑받기에 모자란 사람으로 인정해버리고 날아간다. 혼자여도 될 것 같은 그곳으로, 영영.


세기말 같은 시절. 벗어날 수 없는 지옥. 아름답지만 그것만으론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그래서 포기하게 만드는. 깊은 심연을 품기엔 너무나 작은 체구를 가진 그들은 견디지 못한다. 희망은 이야기하지 않아도 돼. 결국 지나가 버리면 그 결과들만이 희망을 걸었다고 이야기하겠지. 남은 이들은 또 남은 날들을 지날 뿐. 구원의 상징처럼 릴리 슈슈에 모든 것을 걸고 있었다. 가학과 희생이 시작과 끝처럼 잇고 피와 울음. 고민과 침묵, 사랑, 상실, 구토의 얼룩만이 전부였던 열네 살. 그때 나는 행복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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