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혹감. 그리고 불안. 초조함. 한심함. 여러 가지 부정적인 감정들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역시 나는 흥청망청 시간을 쓰기로 한다. 돈도 없어서 흥청망청 못해보는데 시간이라도 흥청망청 써보자.
제일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잠이다. 남아도는 시간을 감당하지 못하겠어서, 어차피 쓰려고 해 봤자 유튜브나 보고 인스타만 하는 내가 너무 한심해서 해가 지자마자 잠을 청하는 날도 일주일에 한두 번은 있다. 그렇게 푹 자고 나면 그래도 잠이라도 잤다는 일말의 안도감이 생긴다. 그러고 나서도 책상에 앉아서 명상이라는 이름으로 꾸벅꾸벅 졸아본다. 그러면 시간이 너무 잘 간다.
그다음 비중은 운동이다. 어차피 남아도는 시간, 달리기를 일단 하면 30분을 한다. 나머지 30분은 걷는다. 그리고 씻는다. 물기가 날아가고 뽀송해지기까지 2시간 정도가 훅 간다. 해가 뜨거워서 낮에는 못하고 저녁시간에 하는데 이 역시 시간을 빨리 가게 해줘서 애용한다. 덤으로 여기서 하는 것도 없는 데 체중이라도 줄여보자는 목표에 도움이 된다.
그래도 넘쳐나는 시간들은 책을 읽거나 드라마를 보거나 유튜브를 보거나 인스타와 트위터의 무한반복이다.
책은 동시에 여러 개를 읽는다. 하나 읽다 힘들어지면 또 다른 하나를 읽는다. 그래도 책이 안쓰러워서 대부분의 책들은 대충 읽을지언정 마지막 페이지까지 한 장 한 장 넘겨본다.
드라마도 동시에 여러 개를 보기 시작했다. 사실 드라마 하나를 시작하면 열병에 빠지는 편이라서 애써 안 보고 2시간 내외로 끝내는 영화를 선호한다. 지금도 우영우를 기다리고 있고, 그동안 리스트에 체크만 했던 드라마들을 1화를 시도해보고 있다.
1화는 참 중요하다. 그리고 견디기가 어렵다. 1화에서 많은 이야기들을 하려다 보니 썩 마음에 드는 작품은 거의 없다. 그래도 참고 2화까지는 안쓰러운 책처럼 보려고 한다. 그래도 나는 시간이 많기 때문이다. 꾸역꾸역 "센스 8"이라는 드라마를 3화 중반까지는 봤는데 더 이상 끌리지가 않는다. "테일 오브 더 시티"는 도저히 1화에서 항마력이 딸려서 진행되지가 않는다.
네. 이렇게 넷플릭스를 기웃대느라 시간을 흥청망청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혀 만족스럽지는 않아요.
시간이 이렇게 가지 않는다. 브런치도 했다가 이것저것 기웃대는 중이다.
그런데 시간이 잘 갈 때가 있다.
술을 마셨을 때.
뭘 마셔도 숙취가 괴로워서 음주를 잘하지 않는 편이다. 오랜만에 어제 음주를 했다. 사람들 틈에 있는 것을 견디기에는 음주만 한 것이 없다. 예전에는 술을 잘 못하는 것을 핑계로 음주를 잘하지 않았는데, 요즘은 잘 못하는 술이라도, 술 먹지 않아도 1/n 되는 돈이 아까워서 술을 마셔본다. 그러면 어쩜 그리 시간이 순간 삭제되는지 모르겠다.
혼자는 마시면 안 된다. 그럼 시간도 삭제되고 기억도 삭제되고 다음날도 삭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염없이 술 마시던 구 씨가 너무 이해된다.
어쩌면 음주를 자제하기 때문에 나에게 시간이 너무 많은 건가.
파주에서 근무할 때, 비워지던 술병들. 어떤 날은 해가 지기도 전에 집에서 혼자 마실 술에 들떴던 위태로운 날들이 떠오른다. 왜 깨졌는지 모르는 술잔들이 떠오른다. 그런 걸 떠오르면 술에 정이 확 떨어진다. 술은 잘못이 없으니 나에게 정이 확 떨어진다.
주중에는 이렇게도 시간이 느리게 가다가 주말에는 빨리 감기가 된다. 재생속도 1.5x에서 2x정도 되는 것 같다.
여름의 더위를 겨울에 잠깐 갖다 쓰면 좋을 것처럼 시간도 모아뒀다가 갖다 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시간이 괴로울 일은 없을 텐데.
시간을 알뜰하게 잘 써야 한다는 이 생각. 만족시키며 살고 싶지만 그러기엔 내가 너무 흥청망청이다.
당분간 계속 흥청망청 써야지. 내가 지금 흥청망청 댄다고 해도 미래의 내가 시간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알뜰히 쓴다고 미래의 내가 여유롭지도 않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