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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떼구르르꺄르르 Jul 21. 2022

구 씨가 왜 술을 그렇게 마셔댔는지

시간의 상대성

요즘 나에겐 시간이 넘쳐난다. 헤어날 수 없는 이 시간들은 나에게 당혹감을 가져다준다.


"아니, 이 많은 시간들을 대체 어떻게 써야 하는 거야?"


당혹감. 그리고 불안. 초조함. 한심함. 여러 가지 부정적인 감정들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역시 나는 흥청망청 시간을 쓰기로 한다. 돈도 없어서 흥청망청 못해보는데 시간이라도 흥청망청 써보자.


제일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잠이다. 남아도는 시간을 감당하지 못하겠어서, 어차피 쓰려고 해 봤자 유튜브나 보고 인스타만 하는 내가 너무 한심해서 해가 지자마자 잠을 청하는 날도 일주일에 한두 번은 있다. 그렇게 푹 자고 나면 그래도 잠이라도 잤다는 일말의 안도감이 생긴다. 그러고 나서도 책상에 앉아서 명상이라는 이름으로 꾸벅꾸벅 졸아본다. 그러면 시간이 너무 잘 간다.


그다음 비중은 운동이다. 어차피 남아도는 시간, 달리기를 일단 하면 30분을 한다. 나머지 30분은 걷는다. 그리고 씻는다. 물기가 날아가고 뽀송해지기까지 2시간 정도가 훅 간다. 해가 뜨거워서 낮에는 못하고 저녁시간에 하는데 이 역시 시간을 빨리 가게 해줘서 애용한다. 덤으로 여기서 하는 것도 없는 데 체중이라도 줄여보자는 목표에 도움이 된다.


그래도 넘쳐나는 시간들은 책을 읽거나 드라마를 보거나 유튜브를 보거나 인스타와 트위터의 무한반복이다.




책은 동시에 여러 개를 읽는다. 하나 읽다 힘들어지면 또 다른 하나를 읽는다. 그래도 책이 안쓰러워서 대부분의 책들은 대충 읽을지언정 마지막 페이지까지 한 장 한 장 넘겨본다.


드라마도 동시에 여러 개를 보기 시작했다. 사실 드라마 하나를 시작하면 열병에 빠지는 편이라서 애써 안 보고 2시간 내외로 끝내는 영화를 선호한다. 지금도 우영우를 기다리고 있고, 그동안 리스트에 체크만 했던 드라마들을 1화를 시도해보고 있다.


1화는 참 중요하다. 그리고 견디기가 어렵다. 1화에서 많은 이야기들을 하려다 보니 썩 마음에 드는 작품은 거의 없다. 그래도 참고 2화까지는 안쓰러운 책처럼 보려고 한다. 그래도 나는 시간이 많기 때문이다. 꾸역꾸역 "센스 8"이라는 드라마를 3화 중반까지는 봤는데 더 이상 끌리지가 않는다. "테일 오브 더 시티"는 도저히 1화에서 항마력이 딸려서 진행되지가 않는다.


네. 이렇게 넷플릭스를 기웃대느라 시간을 흥청망청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혀 만족스럽지는 않아요.


시간이 이렇게 가지 않는다. 브런치도 했다가 이것저것 기웃대는 중이다.




그런데 시간이 잘 갈 때가 있다.


술을 마셨을 때.


뭘 마셔도 숙취가 괴로워서 음주를 잘하지 않는 편이다. 오랜만에 어제 음주를 했다. 사람들 틈에 있는 것을 견디기에는 음주만 한 것이 없다. 예전에는 술을 잘 못하는 것을 핑계로 음주를 잘하지 않았는데, 요즘은 잘 못하는 술이라도, 술 먹지 않아도 1/n 되는 돈이 아까워서 술을 마셔본다. 그러면 어쩜 그리 시간이 순간 삭제되는지 모르겠다.


혼자는 마시면 안 된다. 그럼 시간도 삭제되고 기억도 삭제되고 다음날도 삭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염없이 술 마시던 구 씨가 너무 이해된다.


어쩌면 음주를 자제하기 때문에 나에게 시간이 너무 많은 건가.


파주에서 근무할 때, 비워지던 술병들. 어떤 날은 해가 지기도 전에 집에서 혼자 마실 술에 들떴던 위태로운 날들이 떠오른다. 왜 깨졌는지 모르는 술잔들이 떠오른다. 그런 걸 떠오르면 술에 정이 확 떨어진다. 술은 잘못이 없으니 나에게 정이 확 떨어진다.




주중에는 이렇게도 시간이 느리게 가다가 주말에는 빨리 감기가 된다. 재생속도 1.5x에서 2x정도 되는 것 같다.


여름의 더위를 겨울에 잠깐 갖다 쓰면 좋을 것처럼 시간도 모아뒀다가 갖다 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시간이 괴로울 일은 없을 텐데.


시간을 알뜰하게 잘 써야 한다는 이 생각. 만족시키며 살고 싶지만 그러기엔 내가 너무 흥청망청이다.


당분간 계속 흥청망청 써야지. 내가 지금 흥청망청 댄다고 해도 미래의 내가 시간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알뜰히 쓴다고 미래의 내가 여유롭지도 않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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