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떼구르르꺄르르 May 03. 2022

글의 쓸모를 살펴보다

누군가 보아주지 않더라도


수십 가지 발상법보다, '건져 올린' 생각의 재료들을 담아 둔 창고가 더 위력적입니다.
- "평소의 발견", 유병욱, p.62

최근 선배와 밥을 먹으면서 브런치라는 플랫폼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작가 선정이라는 장치가 있긴 하지만 생각보다 정제되지 않은 글도 많고, 고유의 알고리즘 때문에 조회수가 높다고 해서 좋은 글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렇지만 나는 최근 썼던 글들의 조회수를 꾸준히 관찰하고 있다. 사진 에세이는 대부분 좋은 반응을 얻었다. 예전에 조회수가 치솟았던 글들을 확인해 보니, 내용이 특별하지는 않았고 제목이 특이한 것들이었다. 또 그날에 꼭 어울리는 글이 조회수 반응이 좋았다. 예를 들면 월요일에 "길고 무기력한 월요일"이라는 글을 올리거나, 5월 1일에 "5월이었다"라는 글을 올리거나. 사람들도 글을 '소비'한다.


꾸준히 조회수가 올라가고 있는 글은 나의 '브런치 등단'작인 "공간이 주는 안정감"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을 다녀와서 사진과 함께 소회를 푼 글인데,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들을 적은 것이다. 그런데 '국립중앙박물관'이라는 키워드로 꾸준히 유입되고 있다. 박물관에 대한 정보를 알리고자 쓴 글은 아니기에 '낚여' 온 분들께 죄송하다.


조회수 1만 건을 목표로 하자 이 숫자놀음에 점점 빠져들게 된다. 그러자 나만의 글을 쓰는지, 소비되는 글을 쓰는지에 대한 혼자만의 갈등을 한다. 글은 언젠가 읽히기 위해 쓰는 것이므로, 조회수는 높으면 나쁜 점은 없다. 그러나 조회수가 낮은 글들에 대해 스스로 자문하게 된다. 이런 글들은 쓰면 안 되는 글인가?


일단 사진이 없는 글들은 대부분 조회수가 낮다. 사진이 없어도 조회수가 높은 글은 어머니를 소재로 독백 형식으로 쓴 스토리 글과, 코로나 투병기이다. 어머니의 삶을 재구성하고자 했던 글은 (1)은 반응이 조금 있었으나 (2)는 이전 같지는 않았다.


브런치 나의 내면에 대한 기록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내 글은 우울이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우울한 글을 읽고 싶은 사람은 별로 없다. 한참 우울과 공황에 빠졌을 때는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글을 찾아보았고 책도 여러 권 읽었다. 그러나 그때도, 자신의 우울을 객관적으로 잘 그려낸 글에 눈길이 갔지, 감정의 배설과 다름없는 글은 읽다가도 뒤로 가기 버튼을 눌렀다. 조회수에서 내가 그런 글을 쓴 것 같아서 이제 이런 글은 쓰면 안 되나 싶은 조바심이 든다.



그런데 내가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생각이 휘발되는 것이 싫어서'였다. 생각이 휘발되는 것보다 조회수가 더 중요하다면, 내가 하는 생각들에는 일일이 경중의 꼬리표가 달릴 것이고, 남들이 관심 있어할 만한 생각들만 글로 남기게 될 것이다. 나아가 남들이 무엇에 관심 있어할지 생각하겠지? 물론 의미 있는 일이지만, 주객이 전도된 것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유명 카피라이터가 다행히도 이런 내 내적 갈등을 위로해준다. 내 감정의 배설이 좋은 재료라고는 할 수 없다. 그렇지만 내 의식에는 끊임없이 생각들이 둥둥 떠다닌다. 이 생각들이 어디서 왔는지, 왜 떠다니는지, 언제 사라지는지 궁금하다. 그래서 글이라는 수단으로 매체를 바꾸어 날아가지 못하도록 한다. 당장 이 재료는 어떻게 요리해야  모르겠고, 먹음직스럽지도 않아서 대체 무슨 쓸모가 있는지 알 수 없다. 조회수와 관계없이 또 다른 글을 쓰기 위한 재료 글이 될 수 있다.


좋은 재료가 되려면 잘 다듬어져야 한다. 좋은 재료라는 것에 정해진 모습은 없다. 매운맛도 필요하고, 짠맛도 필요하며, 아삭한 식감이 필요할 때도 있으며, 부드러운 질감이 필요할 때도 있다. 무엇이 언제 쓰일지 모르겠다. 이것들이 물건이었다면 수집벽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모으고 모으면, 내 생각들의 실체가 드러나지 않을까. 애초에 이것은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시작한 것이 아니라, 내 순수한 궁금증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일탈 아닌가요"라는 글에 내 글쓰기의 방향을 다시 잡게 된 계기가 나온다. 그날의 상담에서 상담 선생님이 나에게 말했던 문장이다. 선생님은 생각보다 예술에 조예가 깊었다. 영화, 문학의 세계에 대해 잘 아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영화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고 했을 때, 10년 동안 딴 주머니를 차듯이 글을 써놓는다면, 그것이 바로 일탈이라고 정의 내려주셨다.


조회수에 연연하는 것은 '일탈'이라는 단어가 주는 자유를 제한한다. 이 글이 무슨 쓸모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내려놓는다. 퇴사가 떠오를 때마다 적금 붓듯이 글을 써야겠다. "안되면 쓰게 하라" 매거진이 다채로운 생각들로 가득 찰 때까지. 10년 뒤에도 내 아카이브에서 글들끼리 자기 분열과 복제, 융합된 결과물을 가지고 계속 놀이할 수 있기를.

작가의 이전글 5월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