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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의쥰 Oct 23. 2023

결국 이곳이었을 거야

아소토 유니온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놀란다. 이게 그렇게 오래된 음악이라는 것이 믿기질 않아서다. 세상에, 앞에 무수히 남아있어 보였던 그 시간들은 다 어디로 흘러가버렸담! 신나게 리듬을 타다가도 그런 생각이 들면 또 약간은 우울해지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기도 한다. 하지만 다 부질없고 거짓된 생각들이다. 어떤 식으로든 어떤 과정을 통해서든 결국 나는 이곳에 도착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곳, 함께 늙어가고 있는 나의 어여쁜 고양이들과 남집사와 함께 사는 작고, 낡고, 간신히 따뜻한 공간에.


게다가 아소토 유니온(정확히는 김반장)도 이젠 서울을 떠나 그의 동반자와 함께 시골에서의 건강한 삶을 살고 있다. 아소토 유니온의 음악을 들으면 어김없이 떠오르던 오래된 (술)친구였던 힙스터 포토아저씨는 작년부터 술과 담배를 끊고 더없이 건강한 여생을 추구하는 중이다. 여전히 술을 잘 마시는 친구나 동년배를 보면 놀랍기까지 하다. 얼마나 건강하면 저게 가능할까! 술을 마시는 것이 부러운 것이 아니라 그 건강이 부럽다. 그런 생각들을 하다 보면 동세대인 모두들 사이좋게 어깨동무하고 중장년의 나이로 진입하는 이미지가 떠올라서 실없이 웃게 된다. 어휴, 써놓고도 참. 씁.


​책장 한 구석에 꽂힌 채 존재감을 은은하게 드러내며 가슴을 압박해 오던 <괴델, 에셔, 바흐>를 한 달째 읽는 중이다. 호프스태터 이 잔인한 양반. 처음부터 끝까지 못 알아먹을 책이면 차라리 읽을 생각도 못했을 것인데 끝내주는 우화들을 중간중간 박아놔서 희망고문을 한다. 어쩌면 이번 챕터는 제대로 알아먹을지도 몰라… 괴델이 막아선 장벽을 난 결코 넘어서지 못한다. 사실은 이 책의 기본 뼈대를 이루는 수리논리학의 기초부터 버겁다. 그래도 읽는(척 한)다. 너무 무거워서 어디 들고 가지도 못할 책을 펼쳐놓고 책을 읽을 때 쓰는 도수를 낮춘 안경을 끼고 노화가 시작된 눈을 열심히 깜박여가며 읽는 척하듯 훑어 나간다. 빨리 이 알아듣기 힘든 논리학의 전개가 끝나고 재미난 거북이와 아킬레스의 우화가 다시 시작되기를 바라며. 가끔 뇌의 눈으로 그런 내 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본다. 인간아, 고상한 취향과 그에 못 미치는 지능을 가져 고생하는구나.

​한편으로는 <거미여인의 키스>를 함께 읽고 있다. 유명한 작품이지만 선뜻 손이 가지도 않았고, 꽤 많은 연극을 봐왔지만 무대에서조차 접한 바 없었는데 아저씨의 추천으로 읽기 시작했다. 소설을 안 읽고 살아온 것에 대한 반성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과감하고 감각적이고 감성적이다.


​지난주에 커피의 송곳니를 한 개 발치하는 수술이 있었다. 열여덟의 나이를 바라보는 커피에게는 짧은 마취도 부담이 될 수 있어 병원 원장님도 나도 많은 걱정을 했지만 다행히 무사히 수술을 마치고 잘 아물고 있는 중이다. 더 이상 기특할 수가 없다. 발치를 위해 커피를 병원에 남겨두고 수술이 끝날 때까지 그 주변의 동네를 하염없이 걸었다. 어쩔 수 없이 마리가 생각났다. 마리가 떠난 후로 산책은 내게 산소호흡기와도 같았다. 걸어야만 숨을 쉴 수 있었다. 걷고 또 걸었던 2018년의 가을과 겨울을 떠올리며 북아현동의 골목골목을 쏘다니다가 커피가 무사히 깨어나 회복 중이라는 전화를 받았다.


​…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울지 않았다. 나이 드니 그런 순간들이 자주 생긴다. 지난 주말 남집사와 정처 없이 걷다가 미아리고개 마을 장터에 우연히 들러서 전속(?) 밴드 ‘고기엔 마늘’의 공연 끝 부분을 보게 되었을 때도 그랬다. 마지막 곡은 크라잉넛의 ‘좋지 아니한가’였는데 연주도 좋고 보컬의 카리스마가 대단했다. 노래를 부르며 박력 있게 겉옷을 벗어 열 명 남짓한 청중(그중 반이 엄마 따라온 어린이들)에게 던지는 걸 보고 감동받아서 박수를 치는 중에 눈물을 흘릴 뻔했다. 여기서 울면 남은 인생을 내내 따라다닐 망신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혀를 깨물며 참았다. 나중에 집에 돌아오며 사실 아까 공연 볼 때 울컥했다고 남집사에게 이실직고를 했는데, 의외로 남집사는 나를 놀려먹기는커녕 자신도 그랬다고, 몇 번이고 너무 좋았다고 말했다. 나는 속으로 ‘어이쿠 이 녀석…’ 운운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친구야, 함께 나이 들어가니 겹치는 감정이 많아져 좋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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