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석에게서는 더 이상 전화가 오지 않았다. 그는 아마도 성호의 장례식에 갔을 것이다. 소설 속에서는 ‘은이’도 ‘수호’의 장례식에 참석했던가? 그런 세세한 것들이 기억나지 않는다. ‘수호’가 남긴 유언에 대해 ‘아퀴나스 신부’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나의 삶은 소설 속에서나 현실에서나 엇비슷한 궤적을 따라 흘러가고 있었지만 녀석들의 삶은-당연하게도-소설과 완전히 달랐다. 성호가 자살을 하기 전까지는 비슷할 것조차 없어 보였다. 현실에서의 그들은 물 흘러가듯, 그들에게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는 듯한 삶을 살았다. ‘수호’와 ‘아퀴나스 신부’는 성호나 재석과는 완전히 다른 인물들이었다. 재석에게 말한 적은 없지만, 나는 현실의 그들-재석, 성호-보다 아퀴나스 신부와 수호에게 더 친밀감을 느꼈다.
어이없게도 이제야 무슨 이유로 ‘내가’ 그런 소설을 쓰게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어쩌다 그런 내용을 구상하게 되었을까? 곰곰이 생각한 끝에 계기가 되었던 것 중 하나가 테니스 경기였다는 것이 떠올랐다. 테니스 경기가 등장하는 소설을 쓰고 싶다… 뭐 그런 이유였던 것 같다. 우리는 당시에 테니스 경기에 대해 대화하는 것을 좋아했다. 아마도 성호의 취향에 맞추느라 그랬을 것이다. 테니스를 쳐 본 경험이 없는 나와는 달리 재석과 성호 두 녀석은 함께 레슨도 몇 번 받고 둘이 공도 몇 번 쳤다. 하지만 실력은 형편없었다. 본 적도 없으면서 어떻게 그 사실을 아느냐 하면, 실력이 좋았다면 분명 나를 테니스코트로 불렀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 보아라, 나의 이 멋진 모습을. 재석이 녀석은 늘 관객을 필요로 했다. 하지만 녀석은 한 번도 나를 부르지 않았고, 두어 번인가 성호 녀석의 불친절한 경기 매너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 것이 다였다.
그때의 나는 재석이 녀석을 조금 우습게 생각했을 것이다. 곧 죽어도 있는 놈들이 하는 건 다 해야 직성이 풀리는 녀석이었다. 나는 그가 왜 테니스를 좋아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것이 소위 있는 놈들의 스포츠였기 때문이다. 녀석이 영국인이었으면 크리켓을 하고 싶어 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녀석은 테니스를 좋아하는 척하는 것에 불과했다. 녀석의 태도에서 놀라운 점은 그다음 단계였는데, 그는 한편으로 테니스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척’했다. 그건 매우 교묘한 태도였다. 실은 좋아하지만 굳이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겠다는 태도는, 그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설정해 둔 일종의 장치로 보였다. 재석이 동경하면서도 동경하지 않는 끝 지점, 그 소실점에 성호 녀석이 있었다. 녀석은 성호 녀석을 구체제의 귀족 자제라며 공격하고 자신이 혁명군에 속한 신흥 귀족이라도 되는 양 굴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실상 녀석은 제대로 된 부르주아 계급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녀석에게는 내가 필요했다. 내가 있어야 녀석이 원하는 계급의 피라미드가 완성될 수 있었다. 우리가 생물학적으로 다른 성별이었기 때문에 그 노골적인 피라미드의 구조가 보기 좋게 감춰진다는 점도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반면 성호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아집에 가까워 보이는 그의 자존심이 스스로를 구석에 몰아넣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 스스로에 대한 견고한 확신과 믿음은 오히려 그를 위태로워 보이게 만들었다. 그것이 내가 그를 소설에 등장시킨 이유다. 양지에 우뚝 서서 나머지 사람들을 살짝 내려다보는 삶을 사는 그 녀석에게 ‘삶의 이면’이 주어진다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고, 누구의 도움도 구할 수 없으며, 스스로도 구원할 수 없는 식의 이면 말이다- 그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유력한 선택지가 죽음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나는 최대한 단순하게 생각했다. 자살이라는 선택은 민망할 정도로 쉽고도 뻔한 선택이어서 소설 속 ‘수호’에게 미안할 정도였다. 소설을 읽은 재석이 ‘수호’의 죽음에는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고 평가했다. 실제의 ‘성호’였어도 ‘삶의 어떤 이면’을 추구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게 얼마나 경솔하고 무책임한 평가인지 당시의 우리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이 모든 생각들이 나의 편견과 자격지심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상대적 박탈감과 자격지심에서 비롯된 순수하지 못한 마음가짐이 그들의 모든 것을 색안경을 끼고 보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들의 관계, 그리고 우리의 관계를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았다면 전혀 다르게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와서 굳이 그래야 할 필요를 느끼지는 않는다. 재석과 성호 역시 나의 평가를 일방적으로 맞다고 말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전혀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딱 그만큼의 공정성을 지니고 살아왔다.
그 소설은 재석과 성호, 그리고 그들과 나와의 관계 이면에 놓여있는 불편한 것들을 처음으로 의식의 수위로 끌어올린 도구였다. 그래서일까, 재석은 그 소설을 꽤나 재미있어했다. 그는 자신을 모델로 한 인물이 성직자가 되는 것이 근사하다며 만족감을 표하는 한편 아퀴나스 신부와 은이의 관계성이 아주 마음에 든다고도 했다. 소설 속 둘의 관계가 어떤 것이냐고 내가 역으로 물으니 그는 그들이 서로를 존중하는 관계라고 답했다. 그건 꽤나 의미심장한 대답이었다. 결국 우리가 완전히 연을 끊게 된 이유는 서로를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녀석은 나를 무시했고, 나는 그를 경멸했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눈으로 서로를 보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