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세요?”
“나야, 수호. 부탁할 것이 있어서 전화했어.”
“… 그게 뭔데?”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녀석을 말려줘.”
“뭘 말려?”
“로마로 떠나는 거 말이야. 가지 말라고 해.”
“그런… 그런 거면 네가 직접 얘기하면 되잖아. 여태 뭐 하다가 나한테 말리라는 거야?”
“말려봤어. 내 말은 듣지 않아. 네가 해야 해. 네 말은 들을 거야.”
“무슨 근거로? 네 말을 듣지 않으면 내 말은 더더욱 듣지 않을걸?”
“네 말은 들을 거야.” 수호는 같은 말만 반복했다.
은이는 대답하지 않고 잠시 이 녀석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이 녀석은 자신의 친구가 나를 좋아하고 있다고 오해했는지도 모른다. 녀석의 입장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다. 그들의 만남에 나를 불러 함께 하려고 했던 그 모든 시간들이 근거로 작용했을 것이다.
“뭔가 오해했나 본데, 내가 말한다고 해도 녀석은 듣지 않을 거야. 녀석에게 내가 특별하다고 생각한다면, 뭐,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큼 내가 불청객으로 끼어든 적이 적지 않아서 미안하지만,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는 그런 사이와는 거리가 멀어. 나에 대한 녀석의 감정은 절대 그런 특별한 것이 아니야.”
은이는 최대한 단호하게 말했다. 이번에는 수호가 침묵으로 답했다. 뭐라고 대답을 해봐라, 이 녀석아. 그래야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오해를 깡그리 날려버리지. 하지만 수호는 대답을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전화를 끊지도 않은 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은이는 더 기다려야 할지 아니면 전화를 끊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하여튼 네가 오해할 만큼 너희들 사이에 껴들어서 미안했어. 앞으로 그럴 일은, 당연하지만, 없을 거야. 혹시라도 녀석이 같이 보자고 하면 내가 거절하도록 할게. 그럼 이만 끊을게.”
“왜 그렇게 말하지?” 수호가 오랜 침묵을 깨고 말했다.
“응?”
“왜 그렇게 말하느냐고. 너희들 사이에 끼어든다는 표현 말이야. 우리 사이가 뭔데 네가 끼어들었다는 거야? 그냥 다 같이 본 것뿐인데.”
“아, 그 표현이 이상했나 보구나! 그건 그냥 표현이 그럴 뿐 네가 부르지도 않은 내가 자꾸 너희들이 만나는데 함께 한 것이 미안했다는 얘기야.” 은이는 당황해서 약간 높은 톤으로 빠르게 대답했다.
“내가 부르지 않은 건, 그 녀석이 늘 부르니까 내가 부를 이유가 없었던 거지. 네가 함께 어울려서 싫은 적은 없었어. 너야말로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그렇구나. 내가 오해했나 보네. 미안하다.”
“넌 뭐가 그렇게 계속 미안해?”
“뭐?”
“미안할 거 없어. 넌 미안할 일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어.” 수호 녀석의 건조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고, 은이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래.” 알았으니 이제 제발 좀 끊어라, 은이가 속으로 애원했다.
“넌 대체 나를 어떤 사람으로 생각한 거야? 계속 그런 생각을 하면서 어울렸던 거야? 미안하다거나 불청객이라거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수호가 끈질기게 이어나갔다.
은이는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둘 사이의 연결고리였던 친구 녀석이 로마로 떠나고 나면 또 볼 일이 없을 녀석인데 이런 대화가 꼭 필요한 것인지에 대해, 그리고 녀석의 말에 미묘한 모욕감을 느끼고 있는 자신에 대해. 은이는 버스 창문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내가 굳이 거길 왜 가야 하지?’ 생각하면서도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옷을 골라 입고 굳이 그 만남에 합석한 자신을, 뭔지 모를 굴욕감을 느끼면서도 견디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너 취했어. 난 이제 버스에서 내려야 해. 잘 살아라.” 은이는 빠르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잠시 휴대폰을 잡고 있었지만 전화벨은 다시 울리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며 은이는 모멸감과 자기 연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수호가 자신을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했는데 왜 모멸감이 느껴지는 것인지 은이는 알 수 없었다. 무의식 속에 안전하게 감춰두었던 자신의 감정이 터져 나오는 바람에 느낀 모멸감이었다는 것을 은이는 한참 후에나 깨달았다. 휴대폰을 들어 착신번호에 남아 있는 수호 녀석의 전화번호를 내려다보았다. 저장 아니면 삭제. 은이는 자신이 무엇을 선택할지 잘 알고 있었다. 삭제를 누른 후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제 정말 끝났다고 생각하자 무의식에 감춰져 있던 감정이 물에 떨어뜨린 한 방울의 잉크가 퍼지듯 의식의 영역에 무작위로 퍼지기 시작했다. 내가 너를 어떻게 생각했냐고? 어떻게 생각했을 것 같아? 그렇게 말하는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했지? 내가 단지 네가 사주는 비싼 밥을 얻어먹으러 그 자리에 꾸역꾸역 참석했을까? 네가 보여주는 비싼 공연들을 거절하면 다시는 볼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내 월급으로는 상상도 못 할 프랑스 여행과 테니스 경기를, 그 꿈같은 경험을 선사한 도련님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니면 혹시라도 너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나를 보는 너의 그 영혼 없는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는 것이 싫었다. 너야말로 너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나를 어떻게 생각해 왔지? 우리가 동등한 인간이기는 했어?
차마 물어보지 못했던 질문들이 의식 속에 쏟아져 나왔다. 은이는 머리를 털듯이 흔들며 전화번호를 서둘러 삭제하길 잘했다고 중얼거렸다. 이 질문들은 언제라도 쏟아져 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들처럼 느껴졌다. 혹시라도 수호 녀석에게 전화를 걸어 이런 질문들을 털어놓는다면 그 역시 감추고 있던 경멸의 감정을 드러낼지도 모를 일이었다.
잘 살아라, 이 자식아. 너는 내게 백마를 탄 왕자님 따위가 아니었어. 너는 그저 더럽게 재미없는 농담만을 늘어놓는 밥 잘 사주고 재수 없는 부잣집 도련님이었을 뿐이야. 이제 우리가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