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이 모인 송별회의 초반 분위기는 썰렁했다. 수호 녀석은 말없이, 혼자 와인을 한 병 이상 마셨다. 가끔 ‘성직자가 되겠다고 선언한 녀석’에게 시비를 걸듯 말하기도 했지만 그들은 원래 그런 식으로 서로 시비를 걸듯하는 대화를 일상적으로 해왔기 때문에 심각한 다툼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농담 섞인 말다툼인지 말다툼 섞인 농담인지가 오가는 중간중간, 은이는 로마에 가겠다는 진짜 이유가 뭐냐고 두어 번 질문을 했지만 녀석은 여전히 사제복에 대한 얘기만 늘어놓았다.
딱 한 번, 모임이 끝날 무렵, ‘사제가 되겠다고 선언한 녀석’이 약간은 진지한 얼굴로, 인생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도무지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한 탐구만이 자신의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들어줄 것이라는 말을 했다. 취기가 오른 수호 녀석이 헛소리 집어치우라고 소리를 지르더니 와인잔을 잡고 은이에게 건배를 제안했고, 어정쩡하게 잡은 은이의 와인잔에 자신의 와인잔을 냅다 부딪쳐서 결국 둘이 든 잔이 모두 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다행히 와인이 옷에 묻거나 깨진 잔에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은이는 덕분에 정신이 확 드는 것을 느꼈다.
‘이 정신 나간 부잣집 도련님들 사이에서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모든 것이 지긋지긋해진 은이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었지만 수호는 많이 취한 것 같았고, ‘사제가 되겠다는 녀석’은 잔이 깨지는 바람에 테이블에 흘린 붉은 와인이 주님의 보혈이라며 두 손을 모으고 헛소리를 지껄이는 한심한 상황에서 그들만 두고 떠날 수는 없었다. 은이가 와인바 사장에게 잔을 깨서 죄송하다고 사과를 하니, 사장은 고개를 저으며 사람 좋게 웃었다. 수호는 그 가게의 매출을 적잖이 올려주는 중요한 손님이었고, 와인잔 몇 개쯤 깨진 것으로 사과를 할 필요는 없다며 신속하게 테이블을 치웠다. 은이는 죄송하다고 말한 것을 이내 후회했고, 후회한 것을 다시 후회했다.
난장판이었던 송별회를 마친 그다음 주, ‘아퀴나스라는 이름의 성직자가 될 녀석’은 자신이 계획한 미래를 위해 로마로 떠났다. 그가 떠나고 난 뒤 한 달 후에 은이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대체 왜? 그냥 계속 다녀도 인생에 득이 될 것이 조금이나마 있을지언정 잃을 것은 없어 보이는 회사였다. 미래에 대한 어떤 전망이나 희망을 제시해주지는 않지만 생각 없이 하루하루 보내기에는 적당한 노동강도와 그에 걸맞은 최저시급에 가까운 월급을 제공하는. 많지는 않아도 통장에 꼬박꼬박 찍히는 그 숫자는 지금껏 은이의 마음에 큰 안정감을 주었다.
은이의 부모는 회사를 그만둔 은이에게 크게 실망했다. 그들은 은이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안정적인 회사에 취업을 하고, 그럭저럭 괜찮은 사람을 만나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정상적‘인 인생을 살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 외 은이에게 딱히 바라는 것은 없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로 한 동안 기껏 시간제 일거리나 하고 살더니 비로소 정규직에 취직이라는 것을 한 은이를 대견해하는 것도 잠깐, 고작 일 년 반 남짓 다니고서는 그만두었다고 하니 실망하는 것이 당연했다. ‘어쩌겠어, 지 인생인데.’ 은이에게 큰 기대가 없던 아버지는 이내 무심하게 말했고, 어머니는 한숨을 쉬었다.
은이도 스스로에게 실망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꼭 그만두어야 했느냐고 이후로도 몇 번이나 물었다. 대체 왜? 은이는 갑자기 사제가 되겠다며 로마로 떠난 친구 녀석을 떠올렸다. 설마 그 녀석 때문이야? 은이가 자신에게 물었다. 그 녀석이 사제가 되는 것과 회사를 그만두는 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
상관있어. 은이가 자신에게 대답했다. 은이는 녀석이 정말로 사제가 된 후에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상상하다가 미래의 자신에 대해서도 상상하게 되었다. 그렇고 그런 회사에서 여전히, 녀석이 떠날 때와 다를 바 없이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예측이 가능했고, 가능하고, 가능할 자신의 인생을. 은이는 순간적으로 스스로에 대한 경멸의 감정을 느꼈고, 그 감정에 당황했다.
‘막상 그들은 나를 경멸하지 않는다. 아니, 그들은 ‘굳이’ 나를 경멸하지 않는다. 그들은 나를 가끔 신기하게 여기고, 가끔은 성가시게 여길지도 모른다. 아니다. 나는 그들을 성가시게 하지 않는다. 그들이 나를 성가시게 한다. 그들 사이에 생길지도 모를 사고를 완충하는 도구로 이용한다. 나는 그런 쓸모가 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자신들의 길을 간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길, 가능해 보이지 않았던 길을, 그들만이 가능한 방법으로. 하지만 나는 언제까지 이곳에 있겠지. 내게는 달리 갈 곳이 없으니까. 내게 주어진 길은 언제나 간신히 이어지는 하나의 길이었으므로. 벗어나면 낭떠러지라고 사람들이 항상 겁을 주니까. 언제까지나 이 길 위에서, 이 모습으로, 그저 세월의 더께만 육체에 내려앉는 것이겠지.’
은이의 생각은 친구 녀석의 송별회가 있던 그 밤의 기억으로 이어졌다. 집으로 가는 심야버스 안에서 수호의 전화를 받았던, 그 밤. 수호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은 처음이었다. 그가 자신의 전화번호를 저장해 놓았으리라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전화를 건 사람이 수호라는 사실에 은이는 꽤나 당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