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벨이 울리고 그것이 재석이라는 것을 확인했을 때 느낀 감정은 실망에 가까웠다.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나는 그와 영원히 연락이 끊기길 바랐던 것 같다. 그것도 내가 아닌 재석의 의지로. 그에게 연락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거부당했다는 것이 내가 생각한 최상의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그는 나를 실망시켰다. 전화벨이 금방 끊길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고 가만히 휴대폰을 보고만 있었다.
기대했던 대로 전화벨은 오래 울리지 않고 잠시 후에 끊겼다. 그러자 나는 또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재석은 성호의 죽음에 대해 뭔가 할 말이 있어서 내게 전화를 했는지도 모른다. 다른 누구에게도 털어놓기 힘든, 어떤 사건, 어떤 감정, 어떤 이유. 녀석은 늘 그런 식이었으니까. 그런 얘기를 왜 내게 하느냐고 물으면 그럼 다른 누구에게 이런 부끄러운 얘기를 털어놓을 수 있겠냐는 식이었다. 그가 내게 그런 얘기들을 겁도 없이 털어놓는 이유를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나는 내가 인간관계로부터 고립된 인간이라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쉽게 퍼져나갈 수 없다는 것 때문이었고, 또 하나는 우월감 때문이었다. 이 정도 치부를 네게 들킨다 해도 그것이 약점조차 될 수 없다는 자신만만함. 그의 속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털어놓는 은밀한 이야기들을 애써 무심하게, 귀담아듣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럴수록 그 자체로 그가 내게 비밀스러운 이야기들을 털어놓는 세 번째 이유가 되었다. 내가 녀석을 밀어낼수록 녀석에게는 내가 믿을 만한 이야기 친구였을 것이다.
잠시 휴대폰을 들여다보다 구석에 던져놓고 다시 눈을 감았다. 급한 놈이 우물 파겠지. 절박하게 할 이야기가 있다면 다시 연락을 할 것이다. 아니라면, 이대로 끝이라면 더 좋다. 잠시만 해도 들끓던 불안감이 잦아들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상한 사진을 발견한 후 뭔가에 사로잡힌 듯 녀석에게 연락을 취해보려 했던 때와 상황이 역전된 것이 마음에 들었다.
잠들기를 바라며 눈을 감았지만 정신은 점점 더 또렷해졌다. 다시 몸을 일으켜 벽에 등을 기댄 채 휴대폰을 들고 성호의 기사가 올라왔던 인터넷 커뮤니티의 게시판을 찾아봤다. 여전히 일정한 속도로 댓글이 달리고 있었는데, 정치적 음모론 혹은 잘 나가던 인간의 허무한 죽음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쾌감을 동정심으로 애써 포장한 듯한 글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글들을 읽으며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나는 성호의 죽음에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 동명이인의 누구도 아닌 ‘그 성호’가 죽은 것이 확실해진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은 무엇인가?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별다른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한 인간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안타깝고 놀랄 만한 일이지만, 특별한 슬픔이나 애도의 감정은 들지 않았다. 나는 어쩌다 이런 냉혈한이 된 것인가? 나는 나의 무덤덤함에 대해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것일까? 그에 앞서, 나는 죽은 변호사와 ‘특별한 관계’ 즉 친구 사이였나? 나는 그와 내가 친구였다고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는 심지어 친구의 친구라고 말하기에도 어딘지 불편함이 느껴지는 존재였다. 나는 그들과 어울리던 시절에 재석과 나 사이의 보이지 않는 계급 차이, 심지어 재석과 성호 사이의 계급 차이에 대해서도 늘 의식하고 있었다. 그만큼 나와 성호 즉 죽은 변호사 사이에는 좁혀지지 않을 무언가가 있었다. 이제와 말하자면 나는 성호의 농담에 한 번도 진심으로 웃어 본 일이 없다. 그 이상하고 비틀렸으며 오만한 말들이 농담이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지만 성호는 스스로를 상당히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듯했고, 그가 사주는 근사한 저녁 식사를 앞에 둔 재석과 나는 빠르게 눈빛을 교환하며 그의 농담에 함께 웃어주거나 애써 ‘그럴듯한 농담’으로 재포장해주고는 했다. 성호는 그럴 때마다 꽤나 만족한 눈치였다.
그들의 만남에 매번 나를 부르겠다는 재석을 성호가 반대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재석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네가 유머를 곧잘 구사해서 마음에 든대.” 내게 재석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나 또한 그래.” 재석이 웃으며 덧붙인 말이 뇌리의 구석에 박힌 채 오래 남아 있었다. 그들은 광대를 부른 것이다.
잊고 살았던 감정마저 소환되자 진절머리도 나고 지치는 기분이 되어 이제 그만 게시글의 댓글창을 닫으려는데 끝에 달린 댓글 하나가 눈에 띄었다.
‘이중적인 삶을 사는 것이 쉽지는 않았겠지. 당신의 부인과 자식들만 불쌍할 뿐이야.’
무슨 뜻이냐고 묻는 대댓글들이 빠르게 달렸지만 답변은 없었다. 새로고침을 하자 문제의 댓글은 삭제되고 없었다. 하지만 간신히 진정시켜 놓은 나의 심장은 다시 두근거렸다. 나는 다시금 재석의 전화를 받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재석이 댓글과 관련되어 있든 있지 않든 분명 녀석은 뭔가 알고 있을 것이다.
냉정함을 되찾기 위해 다시 생각을 정리해야만 했다. 혹여 나의 소설에서처럼 그의 결혼이 자신의 정체성을 감추기 위했던 위장결혼이었고, 이중적인 삶을 유지하는데 환멸을 느낀 그가 죽음을 선택한 것이라 한들 그의 죽음은 나와 관련이 없다. 하필이면 현실과 소설의 공통점이 성호(수호)의 자살이라는 이유 때문에 섬뜩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한국은 원래 자살률이 높은 나라가 아니던가! 무엇보다 성호가 그 소설을 읽었을 리가 없다는 믿음이 마음을 안정시켰다. 이중적인 삶을 운운한 댓글 역시 가십을 좋아하는 누군가, 혹은 성호의 정치적 행보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누군가가 아무렇게나 쓴 글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으로 느껴졌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성호에게 진심으로 미안해졌다. 그에게서 얻어먹은 밥이 얼만데 이렇게까지 냉정하게 선을 그으려고 할 건 또 뭐람. 난 잠시 눈을 감고 다시 한번 성호의 명복을 빌었다. 좋은 곳에서 편히 쉬어라, 이 자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