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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의쥰 Aug 22. 2024

8. 사제가 되겠다는 선언

프랑스에서 돌아온 뒤 은이는 ‘훗날 아퀴나스 신부가 될 녀석’을 한동안 보지 못했고, 따라서 그의 친구인 수호 역시 보지 못했다. 테니스 경기와 에펠탑, 호텔에서 내려다보이던 파리의 거리… 기억을 곱씹으며 은이는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끝내주는 꿈을 꿨다고 생각했다. 그 꿈같던 경험은 역설적이게도 은이를 더욱 현실적으로 만들었다. 은이는 파트타임으로 하던 일을 그만두고 작은 잡지사에 들어가 편집기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걸을 때마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날 혼자 호텔로 돌아가던 골목길을 떠올렸다. 작은 돌을 촘촘하게 박아놓은 고즈넉한 골목길 끝에 있던 서점과 멀리 보이던 에펠탑의 조명 같은 것들을 생각하며 피곤한 발걸음을 옮겼다.


아퀴나스 신부가 될 친구 녀석’의 전화를 받은 것도 그런 환상과 현실이 나란히 공존하는 퇴근길이었다.

“뭐라고? 잘 못 들었어.” 은이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다시 물었다. “어딜 간다고?”

“다음 주, 로마. 이종사촌형이 거기에서 유학 중인데 도와주기로 했어.”

“뭘 도와줘?”

“내가 신부가 되는 거.”

“오, 그래? 신랑은 누구야, 수호야?” 은이는 수호의 이름을 덧붙인 것을 이내 후회했다.

“… 농담 아니야. 은이야, 나는 가톨릭 사제가 될 거야.” 녀석답지 않게 진지한 목소리가 들렸다.

“… 그래, 그렇구나.” 은이는 잠시 걸음을 멈춘 채 넋이 나간 사람처럼 대답했다.

“떠나기 전에 한 번 보자고. 주말에 시간 돼?”

“어, 좋지.”

“그래. 장소는 다시 말해줄게. 아참, 그날 수호도 올 거야. 내가 시간이 없어서 다 같이 만나려고. 괜찮지?”

“어, 물론 괜찮지.”

은이는 전화를 끊으려는 친구 녀석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그런데 왜? 왜 사제가 되려고 해?”

‘곧 신부가 되기 위해 이태리로 떠날 친구‘는 잠시 뜸을 들이다 어물쩍 대답했다.

“글쎄, 그래야 할 것 같아.”

“그런 게 어딨어?”

“설명을 못하겠는데 그래야 될 것 같더라고. 사람이 꼭 무슨 이유인지 알고 행동하는 건 아니잖아.”

은이는 그게 무슨 말인지 잘 알고 있었다. 자신도 그런 식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뭔지 알아.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든다고 꼭 그래야 되는 건 아니야.”

“사제가 되고 싶어. 그런 생각이 든 지 좀 됐어.”

“뭐래, 언제부터?”

“테니스 경기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 사제가 되고 싶다고.”

“테니스 경기가 그렇게 홀리했나?”

“그랬나 보지. 홀리하긴 했잖아?”

“그건 부인할 수 없지만, 왜 꼭 가톨릭 사제야? 홀리한 게 가톨릭 사제 말고는 없어?”

“복장 때문이지. 그걸 몰라서 물어?”

“아니, 알고 물었지. 사제복을 입고 싶어서 사제가 되면 신께서 벌을 내려주실걸?”

“가끔은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법이지. 시작이 사제복이었다 한들 내가 신실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면 신도 용서해 주실 거야.”

그가 ‘주님’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은이는 경악했다. 대학을 다닐 때만 해도 그는 무신론자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하여튼 주말에 봐.” 녀석은 황급히 덧붙이고는 도망치듯 전화를 끊었다. 은이는 통화가 끊긴 후에도 한참 동안 휴대폰을 귀에 대고 있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녀석이라고 중얼거리면서 천천히 휴대폰을 귀에서 떼어 호주머니에 넣었다. 귀에서 울리는 높은 음의 이명을 들으며 멍한 상태로 서있는 은이의 귀에 누군가 ‘올 것이 왔다’고 속삭이는 기분이 들었다. 은이는 머리를 흔들어 이명을 떨쳐내고 다시 발걸음을 천천히 옮기며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제가 되겠다고 선언한 친구 녀석’이 온갖 종류의 제복을 동경하는 것을, 은이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삶의 진로를 정해버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테니스 경기를 보며 녀석이 눈물을 흘렸다는 것도 알고는 있지만, 그 경기를 본 이들이라면 누구나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멀리서 찾을 것도 없이 은이 자신도 감동의 눈물을 흘렸지만 갑자기 없던 신앙심이 솟아난 나머지 성직자가 되겠다고 선언하지는 않았다. ‘분명 뭔가가 있었어. 수호와의 사이에 뭔가 있었던 거야.’ 누군가 귓가에 계속 속삭이는 듯했다. 수호를 피해 도망가려는 것일까? 하지만 본인의 마음이 수호와 다르다면 그만이지 대체 왜 로마에 가서 사제가 되겠다는 것인가? 은이는 벌써 일 년 가까이 지난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그때 은이는 뭔가를 느끼고 있었고 그래서 자리를 피해 주었다. 하지만 그때도 그 뭔가가 과연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고 지금은 더욱 알 수 없었다. 수호의 짝사랑? 혹은 그 반대? 혹은 쌍방인데 집안의 반대로? 아니면 그런 것과 전혀 상관없는 어떤 둘 만의 속사정? 어쩌면 이 모든 것은 나의 망상일 뿐 친구 녀석은 그 자신이 주장하듯 사제복을 입기 위해 사제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진지하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하기사 녀석은 원래 그런 녀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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