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이 이상해.” 은이가 중얼거렸다.
“나도 그래.” 미래의 아퀴나스 신부가 대답했다.
“……”
수호는 아무 말 없이 경기가 끝나고 선수들이 떠난 코트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경기를 보게 되어 정말 영광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안 그래도 고마웠는데 다시 한번 고마워.” 미래의 아퀴나스 신부가 수호에게 말했고 은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수호 녀석은 답례하듯 고개를 몇 번 끄덕이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이윽고 입을 뗐다.
“배고프지 않냐?”
미래의 아퀴나스 신부와 수호가 나란히 앞서 걸어가고 은이는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둘은 가끔 큰 소리로 웃고, 테니스 경기를 재현하듯 팔을 크게 휘두르기도 했으며 한 번은 수호가 미래의 아퀴나스 신부의 머리를 손으로 문질러 헝그리트리기도 했다. 미래의 아퀴나스 신부는 팔을 몇 번 휘저으며 하지 말라고는 했지만 어찌 됐든 즐거워 보였다. 은이는 저 둘 사이에 끼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강하게 사로잡혔다. 재빠르게 개인적으로 챙겨 온 비상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을 떠올렸다. 메트로 안의 저렴한 빵집에서 바게트와 손바닥만 한 마카롱, 그리고 따뜻한 초콜릿 음료를 살 수 있을 것이다. 호텔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커피를 마실 수도 있다.
“야, 난 속이 안 좋아서 오늘 저녁은 호텔에서 좀 쉬고 싶어. 니들끼리 먹어라.” 은이의 말에 미래의 아퀴나스 신부는 약을 먹어보고 결정하자고 했지만 수호는 말없이 은이를 바라보기만 했다. 은이는 수호의 눈을 마주치지 않도록 노력하며 그의 표정을 빠르게 살폈다. 둘만의 시간을 갖기를, 그가 원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고 판단했다. 은이는 눈치가 빨랐고, 자신이 눈치가 빠르다는 사실을 싫어했다. 특히 재석, 수호와 있을 때면 눈치를 보지 않으려 의식적으로 노력했지만 이번만큼은 자신의 눈치를 십분 활용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들러리는 여기까지야.’ 어차피 내일이면 돌아가는 비행기를 탄다. 은이는 미래의 아퀴나스 신부에게 자신은 호텔에 돌아가 먼저 쉴 테니 돌아와서 괜히 문을 두드리며 깨우지 말아 달라고 강한 어조로 부탁했다.
“알았어. 푹 쉬어. 거 참, 뱃속에 거지가 들은 네가 무슨 일이냐, 저녁을 굶겠다니.” 미래의 아퀴나스 신부가 약간 얼떨떨한 듯이 대답했다.
“걱정 마. 내일 아침이면 멀쩡해질 테니 호텔을 떠나기 전에 조식을 잔뜩 먹어줄 테다.” 은이가 대답하고 수호 쪽을 향해 덧붙였다. “좋은 시간 보내라.”
수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은이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마치 사장님이 눈치 빠른 직원을 격려하는 것 같다고 은이는 생각했다.
둘은 은이에게서 빠르게 멀어졌다. 둘은 어디로 가서 저녁을 먹을까? 근사한 곳이겠지. 와인도 한 잔 곁들일 테고. 은이는 발길 닿는 대로 걷다가 에펠탑을 찾아봤다. 어느 방향일까? 제 자리에서 두 번 정도 돌다가 골목 사이로 보이는 모습을 발견하고 그대로 서서 한참을 바라봤다.
‘친구 잘 둔 덕분에 들러리 선 대가로 이런 황홀한 경험을 다 해보는구나.’ 은이는 잊지 않겠다는 듯 불이 켜진 에펠을 보고 또 보았다. 천천히 발길을 돌려 호텔로 향했다. 가는 길에 빵집에 들러 얄팍한 치즈가 꽂혀있는 바게트도 샀다. 호텔방에 앉아 바게트와 함께 산 따뜻한 초콜릿을 홀짝거리며 수호와 미래의 아퀴나스 신부에 대해 생각했다. 둘의 관계는 정확하게 무엇일까?
‘녀석도 수호 녀석과 같은 마음일까? 설마 수호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겠지.’
한편으로는 미래의 아퀴나스 신부 녀석이 자신에게 집착하는 이유가 새삼 궁금해졌다.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던 녀석의 호의들이 갑자기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자신이 앉아있는 제법 봐줄 만한 호텔방을 둘러봤다. 두 녀석이 함께 쓰는 방은 은이가 쓰는 방보다 훨씬 크다고 했다. 은이는 방을 구경 오라는 그들의 제안을 거절했다.
은이는 둘 사이에 조금도 엮이고 싶지 않았다. 미래의 아퀴나스 신부가 자신을 이성으로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이미 예전에 배제시켜 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대체 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수호 녀석이 미래의 아퀴나스 신부를 짝사랑한다는 것도 실은 확실치 않았다.
‘그게 사랑이 아니면 뭐란 말이야? 그냥 집착인가? 친구와, 그 친구의 친구인 여자의 왕복 비행기 편과 호텔비용까지 모두 대줄 정도로 재석이 녀석과 이 여행을 꼭 오고 싶었던 것이 단지 집착일 뿐이라면, 대체 녀석의 뭐에 집착하는 거지?’
은이는 바게트를 씹으며 여러모로 생각했지만 생각할수록 모든 관계와 감정이 명확해지기는커녕 점점 더 희미해진다는 인상만 받을 뿐이었다. ‘들여다볼수록 희미해지는구나.’ 은이는 먹다 남은 바게트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시간이 흘러야 명확해지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당시의 은이는 잘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수호도, 미래의 아퀴나스 신부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간혹은 명확해진 듯했다가 다시 희미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그보다도 더 긴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쯤 되면 사실, ‘실체’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