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구지
'딩동댕동~ 딩동댕동~'
'자~ 아침 조례시간이다~ 운동장으로 나가자~'
미리 교실에 들어와 계시던 선생님이 학교 전체에 울려 퍼지는 종소리를 듣고 교실의 학생들에게 말했다.
그 소리를 들은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 실내화 가방을 들고 신발장에서 운동화를 꺼내 운동장으로 향했다.
우리가 서있는 자리는 오른쪽 끝자리이다.
내려오는 계단도 왼쪽 끝 계단보다 중앙 계단에서 내려오는 게 더 빠르다.
교실도 2층 끝 화장실 바로 옆 교실로 옮겨졌다.
언젠가 2층을 바라보며 품었던 동경도, 고학년들만 갈 수 있어 멀리서 지켜만 보았던 2층 끝 건물 안쪽도 이젠 모두 내 차지가 되었다.
그땐 언제 시간이 흘러 2층 교실을 쓰고, 안쪽으로 들어가 볼까?라는 막연한 생각이었지만 막상 세월이 흘러 한 학년씩 올라가다 보니 그때 상상했던 2층 교실의 기쁨과, 만족감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호기심이 불러왔던 감정이었던 것 같다. 아니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성숙해지고, 어릴 때 가지고 있던 호기심과 관심이 사라지고 바뀌며 학년 올라가는 것은 금세 익숙해져서 감정들이 무뎌진 것일까?
6년간 같은 교실을 쓰던 친구들도 몇몇은 전학을 가고, 몇몇은 전학을 왔다.
그래도 언제나 학생이 제일 많은 건 우리 학년이었다.
코를 훔치며 똘똘한 얼굴로 교실에 앉아 선생님을 바라보았던 친구들은 어느새 키가 훌쩍 컸고,
벌써부터 화장을 하기 시작한 여자아이들, 학교가 끝나고 학원에 다니며 공부하기 바쁜 친구들, 선생님이 장난을 치면 어떤 일에든 해맑게 웃으며 박장대소하던 교실은 사춘기가 찾아온 아이들의 무감각한 단색의 적막한 교실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나도 5학년때부터 학교가 끝나면 학원을 다녔는데, 동네 아줌마들이 의기투합하여 우리 동네까지 학원버스를 보내달라고 시내의 큰 학원과 협상을 해서 극적으로 타결했다.
자세한 조건은 잘 모르나 아무래도 몇 명의 학생들을 보내면 버스를 보내준다는 것 같았다.
우리 동네 일산 쪽 끝엔 자동차 정비소가 있었는데 학원버스를 타려면 거기까지 걸어 나가야 했다.
뒷구지에서 일산까지는 마을버스가 없었어서 언제나 걸어 다니거나, 부모님의 자가용을 이용했어야만 했는데 아줌마들의 협상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힘들게 체결됐는지 알 수 있었다.
학원버스는 하루에 두 번 우리를 데리러 오고, 두 번 내려주었다. 그 시간 외에는 버스 시간이 없어 직접 걸어오거나 부모님께 연락해 따로 오는 수밖에 없었다. 나도 5학년때부터 이 학원 버스에 올라타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학교가 끝나고 정확히 5시가 되면 자동차 정비소 앞에서 학원버스를 타고 학원으로 갔다.
영어와 수학을 위주로 국어, 사회도 가르쳐주는 종합 학원이었다.
평소에는 10시까지 수업을 하고 집에 왔는데 중학교, 고등학교 올라가면서 새벽 2시는 기본으로 수업을 했다.
시험기간이면 주말에도 학원에 나가 하루 종일 학원에서 수업을 들었다.
나는 이 학원을 대학교를 갈 때까지 계속 다녔고, 학원 선생님들보다도 더 오래 다녀서 학원에서는 유명인사였다. 나처럼 오랫동안 학원을 같이 다니던 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학원 버스기사 아저씨였다.
처음 5학년때부터 중학교,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기사아저씨는 뒷구지 담당으로 8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리를 태워주고셨다.
내가 수능시험을 치르기 전 마지막 학원수업을 나갈 때 아저씨와 마지막 인사를 했는데
아저씨는 그동안 나 덕분에 계속 즐겁게 일할 수 있었다며 즐겁고 행복하게 살라고 덕담을 해주셨다.
그때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몰라 어리둥절했지만 그동안 감사했고, 건강하시라고 작별인사를 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기사 아저씨는 내가 학원을 그만둔 뒤에 기사일을 그만두셨다고 들었다.
학교가 끝나고 바로 학원을 다니며 자연스럽게 동네에 있는 시간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방과 후에 항상 모이던 뒷구지 슈퍼 앞의 학생들 대부분이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고, 학원을 다니지 않은 아이들도 같이 놀 친구들이 없으니 점차 마을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나도 가끔 학원 쉬는 날이면 방과 후에 뒷구지 슈퍼 앞에 나가곤 했는데 그 이후론 동네 아이들을 본 적이 없다.
뒷구지에는 한순간에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사라지고 고요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학년이 올라가며 학교에서는 야자라는 걸 시작했고, 나의 생활 패턴은 학교 - 학원 - 집 - 학교 - 학원 - 집을 돌아가며 교실에서 수업을 듣거나 자습을 하는 공부패턴으로 변했다.
그때당시 공부를 하지 않으면 실패하는 인생, 좋은 대학을 가지 못하면 실패하는 인생이라는 인식이 팽배하게 퍼져있었어서 학원, 학교를 막론하고 나와 친구들까지 모두 공부에 인생을 걸었다.
공부하지 않거나 공부가 싫다는 친구들은 누구 하나 '왜 꼭 공부만 해야 돼? '라는 의심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런 이야기가 나오면 ' 너 그러다가 포크레인이나 몰아라'라는 농담을 하곤 했다.
학교 선생님들보다 학원 선생님들이 더욱 이런 인식을 깊게 심어주었는데 주기적으로 공부를 못하면 좋은 대학을 못 가고, 좋은 직장을 못 얻으면 돈을 못 벌고, 이쁜 아내도 못 얻고, 집 한 채 가지지 못한 채 인생을 낭비하게 된다는 식으로 우리에게 주입시켰다.
그땐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경각심을 가지고 더 열심히 공부를 해야겠다고 다짐했지, 단 한 번도 왜 꼭 성공하기 위한 방법이 공부밖에 없을까?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고3 인생이 걸린 수능이 끝나고 나는 대학교를 지방에 있는 곳으로 입학하게 되어 20살 때부터는 어쩔 수 없이 독립을 해서 혼자 살아야 했다.
그쯤 대곡초등학교 앞에는 '000 서울대 입학'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려있었는데 나는 단번에 그래... 서울대 갈 줄 알았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흘러 4년의 대학생활, 2년의 휴학과 2년의 군대생활이 지나 8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에 나는 다시 부모님이 계시는 뒷구지 마을로 돌아오게 되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뒷구지는 모든 게 낯설고 새로웠다.
내가 항상 다니던 골목길과 동네 집들은 변한 게 없었지만, 길은 좁아지고 담장과 집들은 작고 낮아진 것 같았다. 어릴 때 바라보았던 동네 거리의 풍경들이 아직 나의 뇌리에 키가 작은 초등학생의 시선으로 기억되고 있어서인 것 같았다.
동네를 돌아다니면 항상 보이던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은 이제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 돌아가시거나 다른 곳으로 이사 가셨다고 들었다. 마을 외곽엔 개발 보상을 노리고 논과 밭이었던 곳들이 전부 3,4층짜리 빌라고 바뀌어 있었고, 흙과 풀내음이 가득하던 뒷구지는 시멘트 냄새로 가득했다.
이제 더 이상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들려오는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저녁을 준비하느라 풍겨오는 밥 짓는 냄새,
아이들을 부르시는 아주머니들의 고함소리,
어슬렁어슬렁 동네를 걸어 다니시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언제나 환하게 불이 켜져 있는 뒷구지 슈퍼와 그 앞을 지키는 화려한 오락기들,
명절마다 한대 모여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제사를 지내는 어르신들,
날씨가 서늘해지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 함께 하는 김장,
책가방을 메고 실내화 주머니를 툭툭 걷어차며 등하교하는 초등학생들,
이 마을 저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같이 즐기는 운동회 같은 것들은 볼 수 없지만
마을을 지날 때마다 기억하는 나의 마음속에는 아직 그때의 따뜻하고 아련한 추억들이 사라지지 않고 모든 걸 기억하고 있다.
내 마음속의 뒷구지는 아직 예전 그대로인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