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잊고 싶어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어떤 순간을, 어떤 사람을, 어떤 감각을 잊어버리고 싶다고.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다고. 그런데 잊고 싶다고 해서 잊힌 적이 한 번도 없다. 가끔은 억울하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그것을 기억하려 한 적이 없는데, 오히려 잊고 싶으면 잊고 싶었지. 대체 왜 자꾸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걸까. 왜 아직도 나를 괴롭게 하는 걸까. 언제쯤이면 떠오르지 않게 될까.
놀랍게도 우리의 뇌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기억을 자신 안에 새기고 있다. 2005년, Caltech와 UCLA의 신경과학자들은 ‘할리 베리 뉴런’에 관련한 현상에 대해 발표했다. 연구팀은 8명의 간질 환자의 뇌에 전극을 삽입하고, 기억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뇌의 구역인 내측 측두엽, 특히 그중에서도 해마에서 뉴런의 반응을 기록했다. 연구팀은 우선 피험자들에게 유명 인물, 랜드마크 건축물, 동물, 사물 등의 사진을 차례대로 보여주고, 자신이 본 사진이 ‘사람’인지의 여부를 컴퓨터 키로 표시하도록 했다. 최소 하나의 뉴런에서 유의미한 반응을 보이게 한 이미지가 확인되면,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그 인물의 다른 3~8가지 사진을 추가로 보여주며 동일한 뉴런이 이에 반응하는지를 테스트했다.
실험 결과, 한 피험자의 좌측 후방 해마에 있는 한 뉴런은 87장의 이미지 중 30장에 반응을 보였는데, 이 뉴런은 배우 제니퍼 애니스톤의 모든 사진에 반응했지만, 다른 사람의 얼굴에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어떤 피험자는 사람 사진에 대해서는 그러한 경향을 보이지 못했지만,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의 이미지에 유사한 반응을 보였다.
그렇지만 더욱 놀라운 결과는 따로 있었다. 한 피험자에서 우측 전방 해마의 한 뉴런이 배우 할리 베리의 사진에 반응을 보였는데, 그 뉴런은 할리 베리의 다른 모든 사진에도 반응을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의 캐리커처, 심지어 그녀의 이름을 철자로 쓴 문자 배열에도 반응을 보였다. 연구팀은 이러한 현상을 관찰한 뒤 소수의 뉴런 집단이 특정 기억에 강렬하게 반응할 수 있음을 발표했고, 이에 ‘할리 베리 뉴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할리 베리 뉴런이 관측되었던 해당 피험자는 굳이 할리 베리를 기억하려 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기억하고 있었다. 뇌는 생존에 필요하거나, 정서적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거나, 본능적인 흥분을 유발하는 어떠한 기억에 대해 뇌 구역의 일부를 할당하고, 기억으로 남겨 저장한다. 그것은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며,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진다.
애석하게도, 뇌가 자기 멋대로 남겨버린 그 기억들은 불현듯 떠올라 우리를 그 기억 속으로 데려다 놓는다. 좋은 기억만 남기면 좋겠지만, 뇌는 그렇게 우리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듯하다. 심지어 기억이라는 것은 잊으려고 의식하면 그 자체로 기억하는 것이기 때문에, 잊으려 하면 더욱 잊을 수 없게 된다. 그저 신경 쓰지 않고 시간이 충분히 지나, 더 새로운 일들이 기억에 새겨져 오래된 기억으로 남기를 바라는 수밖에.
그렇지만 마음이라는 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아마 어떤 슬프고 저린, 아프고 후회스러운 기억은 내 바람보다 훨씬 오래 기억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이다. 기억하려고 애쓰는 것들은 나중에 막상 잘 기억도 안 나는데, 세상 이처럼 속상한 일이 있을까. 나의 뇌는 나 몰래 어떤 기억들을 숨겨 두었을까.
너도 내가 행복하길 바란다면 좋은 기억만 남겨야 하는 거잖아. 나의 행복이 곧 너의 행복이고, 너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일 텐데. 내 말이 들린다면 그 기억은 꼭 지워줬으면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