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이 어딘가
20세기 초, 프랑스의 물리학자인 루이 드 브로이는 극히 미시적인 입자가 단단한 점이 아니라, 파동처럼 퍼질 수 있는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입자는 입자이기만 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이 통찰은 이후 실험을 통해 상당 부분 검증되었고, 그는 그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고등학생 때, 열정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치셨던 화학 선생님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그 선생님은 평소에 ‘화학에 0과 100은 없다.’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는데, 드 브로이의 양자 이론을 가르치시던 그날은 유독 이 문장을 되풀이하셨다. 나는 그때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잘 몰랐다. 사실은 구태여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진도를 따라가기도 벅차서였을까, 아무래도 시험에 나올 내용은 아니라고 생각해서일지도. 나는 그 문장을 들을 때마다 오늘 수업은 이쯤에서 마무리하시나보다 하고 생각하며 칠판에 빼곡히 적힌 글자들을 노트에 옮겨 적곤 했다.
대학에서 우연히 그 부분을 다시 공부하다 문득 선생님의 그 말씀이 생각나 한참 동안 그 말을 곱씹으며 고민해 보았다. 그때 내렸던 나름의 결론은, 비단 과학뿐만 아니라 사람이 관여하는 세상의 모든 일에도 0과 100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마치 그것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 완전무결한 0과 100이라는 숫자로부터 많은 무력감을 느끼는 것 같다. 사실은 나도 그런 고민을 하기 전까지 그런 감정을 자주 느끼곤 했다.
100의 준비는 없다. 사람들은 어떠한 일을 하기 전에 만반의 준비를 하려 한다. 그 일을 시작하고 나서 생길 수 있는 어떠한 어려움에 미리 대비하려 하고, 설사 예기치 못한 상황이 닥치더라도 그에 대처할 수 있는 여유를 갖추려 한다. ‘유비무환’이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완벽히 준비할 수는 없는 법이다. 얼마나 준비해야 100인지, 완벽한지 그 누구도 정해주지 않기 때문에, 본인이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은 결코 그러한 준비를 멈추지 못한다. 문제는 그렇기 때문에 무언가를 새로이 시작하는 데 있어 너무나도 망설이게 된다는 것이다. 새로운 관계, 새로운 일, 새로운 환경, 어쩌면 인생의 새로운 한 장을 여는 것일지도 모르는 순간에, 그 일이 가져다줄 놀라운 행복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대신 나의 미흡함과 부족함을 비관하며 아예 그 일을 시작하기를 포기하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삶은 영원하지 않은데, 언제 완벽히 준비하고 언제 시작할 수 있을까. 언제 첫 발을 뗄 수 있을까.
100의 감정은 없다. 우리가 느끼는 모든 감정에는 그에 반하는 감정이 있다. 정확히 반대되는 감정은 아니더라도, 그 감정을 희석하는 반대의 성질을 가지는 감정들이 있다. 기쁨에 반대편에는 슬픔이, 안정감의 반대편에는 불안함이, 설렘의 반대편에는 무덤덤함이, 기대의 반대편에는 체념이 있듯이. 그리고 우리의 감정은 그런 모든 감정들의 합으로 나타난다. 살면서 한 번이라도 겪어본 모든 감정은, 그것이 어떠한 감정이든,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의 마음속에서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가 느끼는 어떠한 좋은 감정들, 이를테면 사랑, 믿음, 애정, 안정감 같은 것들은 그 이면에 늘 아주 작은 반대의 감정들을 동반하게 된다. 그러므로 각각 한 번이라도 느껴본 두 반대되는 감정은 결코 100이 될 수 없다. 어떤 감정은 나 스스로 만들고 지우지만, 어떤 감정은 다른 누군가에 의해 생겨나기도 한다. 지금의 나는 어떠한 감정이 온전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거의 없고, 그게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예전에는 그게 당연하다는 생각을 미처 못 했다. 그래서 어떤 관계에 놓일 때, 나의 감정에 100의 확신이 없고, 상대의 진심에 100의 확신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 그 관계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온전한 감정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0의 관계는 없다. 우리는 살면서 정말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는다. 출근길에 탄 버스에서 만난 기사님, 일을 시작하기 전 급히 들른 카페에서 내가 마실 커피를 만드시는 점원분, 점심을 먹으러 들른 식당에서 내가 먹을 음식을 서빙 하시는 종업원분, 퇴근길에 종종 마주치는, 전단지를 나눠 주시는 할머님까지. 우리는 그들과의 유대를 관계라고 생각하지 못할지 모르지만, 그들은 많고 많은 사람 중에서 하필이면 우리를 스쳤고, 한 마디의 대화라도 한 분명한 관계의 대상이다. 우리는 누군가와 관계를 맺으면 자연스레 감정을 주고받게 되는데, 그런 일련의 과정을 소모적이고 수고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굳이 한 번 보고 말, 관계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사람들에게 살가운 인사를 건네는 것조차 번거롭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오늘 스친 사람이 언제 다시 인연이 되어 내 앞에 나타날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아무리 사소한 관계라도 그 무게가 0인 관계는 없다.
0의 노력은 없다. 만약 100번의 크고 작은 노력을 한다고 하면, 그중 몇 번의 노력이 결실을 볼까. 많이 쳐서 10번이라고 하면, 남은 90번의 노력 중 그보다 더 많은 20번 정도의 노력은 결과적으로 안 하느니만 못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그렇지만 노력의 의의를 꼭 결실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비록 실패했지만 그 과정에 익숙해져 다음에 같은 노력을 할 때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질 수도 있고, 비록 실패했지만 그 실패를 인정하는 과정에서 정신적으로 더 성숙해질 수 있다. 이런 위안조차 삼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괜찮다. 어떤 목표를 두고 노력하는 일 자체가 박수받아 마땅할 일이고, 그 노력은 어떤 형태로든 우리의 내면에 남아 자양분이 된다. 아침에 일어나 이불 정리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조차도. 퇴근하고 뒤집어 벗은 양말을 다시 뒤집는 것조차도. 그래서 모든 노력은 저마다의 가치가 있다.
0과 100을 표현하는 단어들이 있다. ‘절대’, ‘무조건’ 같은 말들. 말을 사용하는 입장에서는 그만큼 말의 의지나 단호함을 표현하려고 하는 것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좋아하는 말들은 아니다. “앞으로 절대 안 그럴게.”. “네가 원하는 건 무조건 다 할게.”. 사람이 하는 일은 그렇게까지 완벽할 수 없는데, 어떤 자신감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 궁금하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0과 100에 도달하려는 어떤 마음이 아니라, 0과 100일 수 없는 이유에 대한 이해와 인정이라고 생각한다. 그와 더불어 그 마음이 결코 작고 소홀하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전한다면, 그보다 더 멋진 표현이 있을까 싶다.
미시 세계의 아주 작은 입자부터, 우리가 사는 이 거대한 세상까지, 사실 단정되고 확실하게 존재하는 것은 정말이지 거의 없다. 우리는 0과 100 사이에 놓인 무한한 숫자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